항목 ID | GC08600339 |
---|---|
한자 | 先史 |
영어공식명칭 | Pre-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선사/석기,선사/청동기,선사/철기 |
집필자 | 이후석 |
[정의]
구석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 시대까지 경기도 화성 지역의 역사.
[개설]
경기 서남부의 화성 지역은 해양 자원과 내륙 자원을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 조건을 지니고 있어 일찍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화성 지역 선조들은 이러한 입지 조건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과 교류하여 보편적인 문화를 형성하면서 자신만의 역사와 문화를 이룩하였다.
화성 지역 선사 시대 유적은 해안 구릉이나 발안천, 황구지천 같은 관내 하천 주변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현재까지 화성 지역에서 발굴 조사를 통해 면모가 밝혀진 선사 유적은 약 30여 개소에 달하는데, 특히 대형 마을 유적이 다수 분포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마을 유적 조사 결과 제의와 기술을 주도한 거점 마을의 존재도 확인되었는데, 주변 지역에 비해 역동적이었던 화성 지역 선사인의 삶을 반영한다.
[구석기 시대]
남한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 화석 인류 흔적이 잘 확인되지 않고, 이른 시기 유적 또한 희소한 편이다. 남한 지역 구석기 유적은 약 30만 년 전 이후의 것이 많은데, 화성 지역도 마찬가지이다.
화성 지역의 대표적인 구석기 시대 유적은 대개 하천 변의 구릉 완사면에 입지한다. 오산리·청계리 등의 대표적인 유적들은 모두 후기 구석기인의 흔적이다. 오산리와 청계리에서는 뗀석기가 다수 출토되는 퇴적층이 확인되었다. 뗀석기는 약 1만 점이 확인되었는데, 석기 제작 관련 소재를 제외하면 도구 석기는 10% 미만이다. 주먹 도끼, 찍개, 긁개, 밀개, 홈날 등이 확인되었으며, 대부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암으로 제작하였다.
[신석기 시대]
화성 지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은 주로 해안이나 해안 주변의 낮은 구릉 또는 하천 변의 구릉 아래에서 확인된다. 해안가나 하천 변의 구릉지에서는 주거 유적[석교리·가재리·하길리·청계리·수영리], 해안 저지대에서는 조개더미 유적[제부리·지화리·고포리]이 주로 보인다. 또한 해안가에는 대규모의 마을 유적이, 내륙 지류 변에는 소규모의 마을 유적이 산재하는데, 기후 한랭화에 따른 식량 자원 부족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주거 유적은 대개 1~2기 정도의 집자리나 저장 구덩이로 구성된 경우가 많은데, 석교리 신석기 유적에서는 구릉 남쪽과 북쪽 능선에서 26기의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화성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마을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집자리의 평면은 방형이나 장방형이며, 이단으로 굴착된 것이 많다. 또 방형 집자리의 경우, 바닥 중앙 부근에는 화덕 자리가, 모서리에는 기둥 구멍이 배치된 예가 많다. 한편, 수영리 유적에서는 길이 약 10m의 대형 장방형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화덕 자리와 함께 출입구로 판단되는 돌출부가 시설되어 있으며, 모서리 외에 외벽 가장자리를 따라 기둥 구멍이 배치되어 있다. 유물은 둥근 바닥 빗살무늬 토기와 농구류로 추정되는 석기류가 소량 출토되었다. 유적들의 연대는 기원전 3,500년~2,500년경으로, 신석기 시대 중후기에 해당한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면 유적 수가 급증하는데, 화성 지역에서 정착 생활이 본격화된 데 따른 결과이다. 아울러 사회 계층화가 진행되며 고인돌과 같은 석축묘가 조영되기 시작한다. 마을 유적은 수영리·계향리·남양동·주곡리·쌍송리·정문리·금의리·남양리·반월동·반송리·동학산·천천리 유적 등이 조사되었고, 무덤 유적은 병점동·수기리·관항리에서 고인돌, 동화리에서 움무덤이 확인되었다.
화성 지역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정문리 유적과 쌍송리 유적이다. 정문리에서는 장방형 집자리 1기만이 확인되었는데, 이른 시기의 덧띠 새김무늬 토기가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의 가장 이른 시기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쌍송리에서는 세장방형과 장방형의 집자리 36기가 확인되었는데, 입술새김 구멍무늬 토기, 붉은 간 토기 등이 출토되어 청동기 시대 전기 단계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두 유적에서 주목되는 것은 지름 30여m의 도랑 시설이다. 도랑으로 둘러싸인 구릉 정상부는 제의 공간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같은 제의 시설은 집단 의례를 통해 사회 통합이 진전되어 가는 청동기 시대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외에도 천천리에서는 길이 29m가 넘는 초대형의 세장방형 집자리와 함께 송국리식 집자리가 확인되었고, 반송리에서는 송국리식 집자리와 관련되는 장방형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두 유적 모두 청동기 시대 후기 단계를 대표하는 유적인데, 충청도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는 홈자귀, 삼각형 돌칼 등도 출토되어 주변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 관계를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 무덤 유적들은 대부분 지표 조사를 통해 확인되어 구체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동화리 움무덤에서는 탄화 목재가 확인되어 화장(火葬) 널무덤으로도 인식되고 있다. 화장묘는 흔한 것이 아니지만, 무덤 내부에서 목관을 태우거나 그을리는 장송 의례 습속으로 추정된다.
병점동에는 고인돌 4기가 남아 있다. 1호 고인돌은 지상식이지만 납작한 굄돌을 사용하는 것이어서 전형적인 탁자식이나 바둑판식이 아닌 변형 또는 특이 형식 고인돌로 언급되고 있다. 2~4호 고인돌은 개석식 고인돌로 추정된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2m 내외로 중소형이다. 이외에도 수기리에서 고인돌 2기가 확인되었는데, 역시 지상식이지만 굄돌과 덮개돌이 작은 특이 형식의 소형 고인돌이다. 이와 같은 고인돌은 공동체적 지도자의 무덤이자 농경 사회의 기념물로 이해되고 있다.
[초기 철기 시대]
화성 지역의 초기 철기 시대 유적은 많지 않다. 수영리·동학산·장안리·도이리 유적 등에서는 덧띠 토기 바리와 제기 모양 토기를 반출하는 집자리나 구상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발안리·남양동·석우동 유적 등에서는 덧띠 토기 바리와 흑색 긴 목 항아리, 또는 청동 꺾창, 청동 자귀 등을 반출하는 무덤이나 무덤 자리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이 확인되었다.
화성 지역 초기 철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동학산 유적이다. 동학산 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집자리를 파괴하고 산 정상부를 넓게 에워싸며 조성한 3중 환호가 확인되었는데, 규모 100m 내외의 대형 환호이다. 근처에서 세형동검 문화 단계의 청동 끌을 주조하였던 활석제 거푸집이 확인되어 유적에서 청동기가 직접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청동기의 생산-소비 과정에서 주변 여러 마을 구성원이 참여하는 집단 제의 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초기 철기 시대 화성 지역에 주변 지역을 선도하는 첨단 기술의 중심지가 있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여러 마을이 통합되어 정치체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추정하여 볼 수 있다.
한편, 도이리의 구상 유구에서는 덧띠 토기와 쇠 낫으로 추정되는 철기 편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형태상으로는 기원전 2~1세기경으로 편년된다. 다른 지역처럼 초기 철기 시대부터 철기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가치]
화성 지역의 선사 문화는 구석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화성 지역 선사 유적은 해안가나 하천 변의 구릉 지대를 중심으로 확인되는 예가 많고, 무덤 유적보다 마을 유적이 월등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화성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 후기 단계부터지만, 정착 생활이 시작되는 것은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대형 마을이 형성되었고, 주변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사회 통합이 진전되어 갔다. 이어서 초기 철기 시대에는 금속 제작 기술을 독점하는 집단을 중심으로 정치체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화성 지역 집단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한 사회 일원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