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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15
한자 咸陽地域三國時代古墳-交流文化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홍성우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 있는 고분군 중 발굴 조사되거나 혹은 지표 조사된 고분군의 유물을 통해 삼국 시대 함양 지역과 주변 지역의 교류 관계를 살펴본다.

[함양의 지리적 위치]

경상남도 함양군은 한국 남부지방의 중앙부이며 경상남도의 서북단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소백산맥의 최고봉인 지리산을 남으로 하고, 북으로 덕유산을 둔 산악지대이다. 남동쪽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북동쪽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북서쪽으로 전라북도 장수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하동군, 남서쪽으로 전라북도 남원시와 접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가채천은 산 내의 만수천과 만나 마천면임천이 되고, 용유담을 지나면서 휴천면의 엄천강이 되어 산청군과 경계를 이룬다. 백운산에서 발원하는 뇌계수[위천수]는 백전면·병곡면을 지나 함양의 한들[크고 넓은 들]을 적시고 수동면에 다다른다. 덕유산에서 발원하는 간곡수는 화림동[서상·서하]을 지나 안의면에서 심진동의 장수와 합류하여 금천을 이룬다. 이는 수동면에 이르러 남계천이 되어 뇌계수와 만나고, 남동으로 흘러 산청의 경계에서 엄천강과 만나 경호강이 되어 남강으로 흐른다.

함양군은 지리적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에 있어, 과거부터 서부 경상남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함양을 지나는 동서교통로는 경상북도 고령 중심의 대가야 문화가 서진하던 길목에 있었고, 이후에는 백제와 신라가 정치·군사적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로 충돌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함양 지역에서 삼국 시대 고분군이 발굴·조사되어 보고된 예는 상백리 고분군·백천리 고분군·도천리 고분군·손곡리 고분군·공배리 고분군뿐이고, 지표조사에서 확인된 고분군도 신안리 고분군·보산리 고분군·창평리 고분군·난평리 고분군·상개평 고분군에 불과하다.

자료가 부족하여 과거 함양 지역의 정치 세력을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함양 지역의 고분 조사에서 대가야계 유물 위주로 출토되고 있으므로 함양 지역은 대가야 영역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가야 유물 외에 소가야, 아라가야, 비화가야, 백제계 유물도 출토되고 있어 함양 지역은 주변과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함양 지역은 변진 12국 중 어느 한 나라를 형성하고 있었거나, 혹은 개별 소국은 아니지만 소별읍을 형성하여 소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보인다.

[함양 지역에 분포하는 고분]

함양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고분의 현황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 상백리 고분군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남계천이 형성된 하안단구에 있다. 봉토의 규모나 고분군의 전체 범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1972년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긴급 구제 발굴을 시행한 결과에 따르면 고분군의 범위는 이웃 구릉과 경지 일부에 걸쳐 넓게 형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수혈식 석곽묘 8기를 조사하였으며, 벽석은 냇돌로 축조, 규모는 길이 3~4m, 너비 1m 내외, 깊이 1.2m 정도 되는 중소형에 속하는 것이었다. 토기를 비롯한 많은 부장유물이 수습되었는데, 그중에는 발걸이를 비롯한 마구류와 비늘갑옷 및 판갑옷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삼각판을 못으로 고정시켜 만든 판갑옷은 그동안 한반도지역에서는 정식으로 발굴 조사된 예가 없었고, 일본지역에서는 이미 출토 예가 있었기 때문에 한·일 양 지역의 갑옷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는 유물이다. 이 고분군은 석곽이 너비보다 길이가 긴 형태로, 가야 고분 중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이다. 유물 또한 전형적인 가야식 토기를 부장하고 있어서 연대는 5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백천리 고분군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백천리 척지마을에 있는 낮은 구릉에 자리 잡고 있다. 발굴된 고분은 수혈식 장방형 석실묘 5기와 그 주변에 있는 작은 수혈식 석곽묘 21기이다. 유구의 규모는 수혈식 장방형 석실묘는 주실의 길이가 520~735㎝, 너비는 100~110㎝, 높이는 100~175㎝ 내외이고, 부곽의 길이는 300㎝, 너비는 45㎝, 높이는 100㎝ 내외이다. 작은 수혈식 석곽묘는 길이가 300~350㎝, 너비가 70㎝ 내외였으나 높이는 파괴가 심해 알 수 없다. 유물은 토기류·철기류·장신구류 등 2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대부분이 토기류이다. 토기류가 주로 부장된 부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었으나, 철기류와 장신구류가 부장된 주실은 대부분 파괴·도굴되었기 때문이다. 토기는 주로 도질토기이고, 연질토기는 적다. 기종은 유개식원저장경호·원저단경호·평저단경호·유개양이부대부완·유개합·고배·발형기대·낮은 통형기대 등이 있다. 특히 유개식원저장경호와 원저단경호가 발형기대 및 낮은 통형기대와 결합되어 출토된 예가 많고, 대부장경호는 아주 적다.

손곡리 고분군은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 지곡마을 동쪽에 있는 임천강의 하천유역 해발 150m 정도의 넓고 평평한 충적대지에 다수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다. 고분 조사는 1993년 3월 18~29일까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15~2017년까지 두류문화재연구원에서 각각 이루어졌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의 조사 결과 삼국 시대 수혈식 석곽4기가 확인되었고, 토기류 24점, 철기류 30점이 수습되었다. 석곽은 모두 길이가 2~4.5m 이내의 소형들로 주축 방향은 강의 흐름과 나란하였다. 석곽은 하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냇돌을 이용해 4벽의 최하단석부터 서로 물리도록 쌓아 올리고 모서리 부분은 둥글게 축조하였다. 석곽의 상부는 이미 훼손된 상태여서 원래의 모습은 파악할 수 없으나, 석개보다는 목개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구 내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장경호와 직구호들만 있어, 고배나 기대 등 주변의 대가야 문화권 내에서 많이 보이는 토기 유물들은 전혀 부장되지 않았다. 두류문화재연구원의 조사 결과 삼국 시대 목곽묘 21기, 석관묘 27기, 석곽묘 174기, 옹관묘 3기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석곽묘에서만 장경호·단경호 등 호류(壺類)와 철기류, 장신류 등 총 911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도천리 고분군은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의 낮은 구릉에서 석곽묘 10기가 조사되었다. 석곽묘는 땅에 구덩이를 판 후에 석곽을 축조하였다. 급경사를 이루는 원지형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경사 아랫면의 장벽을 축조할 때에 약간의 홈을 파서 벽석을 세우고, 이와 함께 벽석 외부에 점성이 강한 보강토를 쌓아 올려 석곽의 축조를 견고하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도천리 고분군에서 발굴 조사된 10기의 석곽묘 중에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2호 석곽묘를 제외한 9기의 석곽묘에서는 토기류·철기류·장신구류 등 총 6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중 토기류가 34점, 철기류가 16점, 장신구류가 7점으로 토기류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토기류는 개·배·장경호·연질완·연질배가 대부분이었고, 고배류는 출토되지 않은 특징을 보였다. 5호와 7호의 석곽묘에서는 개배와 장경호가 조합된 부장양상을 보였다. 철기류는 소도 1점·철촉 2점·철겸 2점·철부 1점·철탁 8점 등이 출토되었다. 철탁 8점은 모두 4호 석곽묘에서 출토되었고, 소도 1점·도자 1점·철촉 2점은 모두 9호 석곽묘에서 출토되어 피장자의 신분과 관련된 부장유물로 생각된다. 장신구류는 모두 금동이식으로 1, 5, 8, 10호 석곽묘에서 출토되었다.

공배리 고분군경상남도 함양군 함양읍 공배리의 소무산 동남쪽 구릉 말단부에 입지한다. 수혈식 석곽묘 15기, 횡구식 석실분 1기를 조사하였다. 유물은 개배·유개단경호·유개장경호·유개파수부호·유개고배·대부완·장경호·철촉·철겸·도자 등이 출토되었다.

[함양 지역 고분에 반영된 교류상]

함양 지역은 삼국 시대 당시 어느 지역에 속하였는가를 단정 짓기 모호한 지역이다.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의 변방이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 없지만, 발굴되는 유물로 보아 가야국의 변방으로 짐작된다. 이후 신라가 점점 팽창하고, 가야가 신라에 흡수됨으로써 함양 지역도 신라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신라와 백제 사이 세력 다툼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정치와 문화가 복잡하게 전개되었고, 양국의 문화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시대 함양지역의 문화를 파악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화를 밝히는 의미를 넘어서, 당시의 복잡한 역사를 밝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발굴 조사된 고분군의 축조 연대는 상백리 고분군이 5세기, 백천리 고분군은 5세기 후엽, 손곡리 고분군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공배리 고분군은 5세기 후엽~ 6세기 초엽, 도천리 고분군은 5세기 후반 정도로 추정된다. 함양 지역 고분군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주로 축조되었다. 이 시기는 가야세력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이다. 함양 상백리·백천리 고분군의 경우 묘제와 출토 유물이 모두 대가야 지역 또는 합천 지역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형태와 동일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것은 대가야의 지방세력이거나 대가야에 의해 완전 병합된 정치 세력으로, 대가야 문물을 소유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지배집단을 형성한 지역으로 추정된다. 손곡리 고분군의 소형 석곽묘에서는 최하단을 세워쌓기하고 상부는 눕혀쌓기로 축조한 형태가 조사되었고, 출토유물은 대가야양식토기·소가야양식토기·백제양식토기·아라가야양식토기·창녕양식토기 등이다. 대가야양식토기의 출토 수가 가장 많고, 창녕양식토기가 가장 적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 토기가 지역색을 띠는 동시에 재지계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인접한 고분군 내에서는 대부분 대가야양식토기와 소가야양식토기를 중심으로 부장되었으며, 주로 5세기 중엽 토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를 통해 대가야의 진출 시기와 당시 함양의 지리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함양은 과거 대가야와 백제의 국경을 접하던 지대로 대가야·소가야·백제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당시 세력들의 경계상에 있으면서 다양한 문화의 점이지대(漸移地帶)적 특성을 보여준다. 손곡리 고분군은 규모가 다른 가야지역의 수장급에 비해 작고, 출토유물에서 신분의 지위를 보여주는 위세품(威勢品)이 극히 드물다. 이는 고분 축조 집단이 강력한 권력을 형성한 존재라기보다는 이 지역에 농업을 기반으로 생활하던 하급 신분집단의 분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분집단은 당시 권역에서 강세를 보이는 세력의 변화에 따라 소규모 교류를 통해 그 세력들의 문화를 받아들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이로 인해 대가야·소가야·백제 등 다양한 유물이 발굴된 것으로 판단된다. 공배리 고분군의 수혈식 석곽묘에서는 대부장경호와 파수부합 등과 같은 대가야양식토기가 부장되었으나, 횡혈식 석실분에서는 단각고배와 장경호 등의 신라양식토기가 부장돼 있다. 이는 고분군의 사용 시기 중 대가야 문화와 주변 문화와의 관련성을 짐작할 수 있으며, 대가야의 영향권에서 신라의 영향권으로 바뀌는 과도기에 축조된 고분군으로 판단된다. 도천리 고분군의 경우 묘제에서는 소가야 중소형분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출토 토기에서는 대가야양식 재지토기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대가야에 의해 완전히 병합된 정치 세력이 아님을 나타낸다. 이들은 대가야의 영향권에 속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계를 가졌으며, 지리산 자락을 기반으로 한 재지의 정치 세력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함양 지역 고분에 대한 재해석]

대가야의 팽창이 급속도로 이루어진 5세기 후반 이후, 대가야양식토기 문화의 확산은 합천·산청·함양·거창 등지의 서부 경상남도 일대에 넓게 나타난다. 당시 대가야권은 황강수계·남강수계·소백산맥·섬진강수계를 넘어서 고령에서 남해안 항구인 하동으로 향한 교통로 주변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 교통로는 대가야가 479년 남제에 사절을 파견할 때의 교통로로 추정된다. 최대 분포권을 보이는 시기는 5세기 후반과 6세기 전반으로 동으로는 낙동강 이서인 고령·합천·의령의 북부지역, 북으로는 거창·함양, 서로는 남원·장수지역, 남으로는 섬진강 유역의 구례와 남해안의 하동·여수·순천에서 대가야양식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함양 지역 삼국 시대 고분군에서도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이르는 대가야양식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일부 고분군에서는 석곽의 축조 역시 대가야 지역 고분과 유사한 형태로 조사되었으므로, 5세기 후반경 함양 지역이 이미 대가야문화의 영향권에 속하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매장유구의 축조와 부장유물의 경우 고령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 권역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합천 지역 토기가 출토되는 등, 일정한 형태의 공통 요소들이 함양 지역의 고분문화 내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삼국 시대에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였던 고대인들의 장송의식(葬送儀式)이 인근의 대가야문화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토착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부장유물의 기종 구성면에서뿐만 아니라, 토기의 세부적인 형식차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함양 지역 상백리 고분군, 백천리 고분군, 손곡리 고분군, 공배리 고분군, 도천리 고분군의 유구와 유물로 보아 지금까지 기록상에는 보이지 않는 가야제국(加耶諸國) 중 한 나라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함양 주변 지역과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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