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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201312
한자 韓國戰爭前後民間人虐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동석

[정의]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빨치산 토벌이 마무리될 때까지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

[지리산과 함양, 민간인 희생]

함양 지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을 거쳐, 1954년 빨치산 토벌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까지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함양군은 남쪽의 지리산과 북쪽의 덕유산 사이에 있어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의 거점이 되어온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군경 토벌 과정에서의 민간인 희생, 빨치산에 의한 우익인사들의 희생 등 수많은 사건이 있었다. 함양군 수동면 도북마을 32명과 죽산리 치라골 17명을 비롯해 안의·백전·서하·휴천·지곡면 등지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빨치산에 협력하였다는 혐의로 군경토벌대에 의해 불법 처형되기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부 좌익혐의자와 보도연맹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인민군 점령 시기에는 수많은 청년이 자의 또는 타의로 의용군에 징발되어 희생당하거나, 우익인사들이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학살당하기도 하였다. 인민군 후퇴 시기에는 진주 등 경상남도 서부 일대의 우익인사와 경찰, 공무원 등이 함양에서 학살당하였다. 1951년 2월 7일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함양군 휴천·유림면과 산청군 금서면에서 주민 705명을 학살한 ‘산청·함양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1954년까지 계속된 빨치산 활동과 군경의 토벌 작전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잇따랐다.

이처럼 함양군은 1948년부터 1954년까지 약 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사실상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희생자의 규모를 떠나 다양한 유형의 민간인 희생 사건이 발생한 지역이었다.

함양군과 함양문화원에서 편찬된 『간추린 함양 역사』[2006]에는 “조국 광복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국가가 혼란에 이르고, 함양 지방은 지리산덕유산 사이에서 더욱 고충을 감수해야 하였다. 국토분단, 사상적 대립, 여순반란사건, 빨치산의 준동, 6·25사변 등 혼란 상태로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지리산덕유산을 끼고 있는 자연적 조건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원자력의 힘으로 지리산덕유산을 동해(東海)로 던졌으면 좋겠다고 탄식하고 있다. 『함양군지』[1995]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북한군의 포성은 멀리 갔으나 공비들의 총성과 습격은 날로 심해졌다. 낮에는 들로 나가 일을 하고 해만 지면 피신지를 찾아서 들판이나 냇가의 바위 밑을 더듬어야 하며, 또는 지서가 있는 소재지로 옮기든지 아니면 밤에 잠만 자러 가야 할 딱한 일들이 하루 이틀이 아닌 몇 년을 계속하였으니 함양의 자랑이요, 우리나라의 명산인 지리산덕유산이 있기에 그들의 근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이제는 명산도 원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연로(年老)한 사람들이 모이면 ○○비결에 ‘초입자(初入者)는 멸(滅)하고, 재입자(再入者)는 생(生)하고, 삼입자(三入者)는 불급(不及)’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지리산을 두고 예언한 것인데, 지금의 공비나 패잔병은 초입자이니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자위하였다. 사회에서는 ‘함양, 산청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여 공무원의 귀양살이인 좌천지(左遷地)가 되었고, 그와 반대로 함양, 산청만 벗어나면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심지어 외딴 섬으로 가더라도 영전(榮轉)이라 하여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애썼다. 그러니 똑똑하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고, 늙고 병들고 힘없고 가난한 자나 오도 가도 못할 사람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대로 살고 정든 땅 조상의 뼈가 묻혀있는 고향을 떠날 수 없어 지리산덕유산을 바라보며 ‘원자력의 힘으로 고스란히 저 산들을 떠다가 동해(東海)로 던졌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하다가 ‘무거운 절 떠나라 하지 말고 가벼운 소승(小僧) 물러가오’하는 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훌훌 떠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떠난 사람 모두가 잘되었다는 후문이다.”

[한국전쟁 이전 함양 지역의 사회상황]

1. 해방 이후 함양 지역의 사회 동향

해방 후의 함양 지역은 한반도 내의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서 많은 사람이 귀환하였다. 1932년 함양의 인구가 조선인만 7만 6,401명이었는데, 해방 이후인 1949년에는 10만 2,184명이었다. 1944년과 1946년 사이에 함양인구가 20% 증가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이 중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유학 갔던 청장년을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들이 있었고, 이 외에 일제 강점기 말기에 징병·징용·학병을 피해서 산으로 숨어 들어가 무장단체를 조직하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해방 직후 많은 사람이 함양 지역으로 귀환하면서 함양 지역에도 좌우의 이념적 갈등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같은 마을 같은 집안에서도 좌익·우익이 갈라져 대립하기도 하였다.

① 좌익의 활동

좌익이 활동하였던 조직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였다.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가 결성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의 지도부는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였던 자, 3·1운동·의열단·신간회에 가담하였던 민족주의자, 건국동맹에서 활동한 인사 그리고 지역의 명망가 등이다. 함양 지역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귀환한 민족개혁세력들이 함양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정신적 지주는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일제 강점기에 함양청년회 위원장, 신간회 함양지회 회장을 지냈던 양지환(梁址煥)이었다. 함양 지역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양지환이 추대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상남도지부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인민공화국으로 해소되면서, 지방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지부도 점차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경상남도인민위원회가 탄생하자 경상남도의 각 지역에서도 속속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함양군도 인민위원회가 통치권을 장악한 지역이었다.

② 미군정의 활동

미군정부대는 1945년 10월 초 대부분의 시·군에 진주하였다. 98군정대는 부산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58·70중대는 본부를 진주시에 두고 합동으로 진주·남해·사천·하동·진양·산청·함양·합천·거창을 관할하였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탄압하는 동시에 대부분 일제하의 관리를 지냈던 자들을 다시 각 군의 군수에 임명하였다. 각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와해조치에 따라 인민위원회 세력들도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대가 함양에 진주한 후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많은 뜻있는 인사들을 실망시키는 일이었다. 미군정이 일제 강점기 때의 경찰들을 석방시켰던 것이다. 이에 함양의 인민위원회는 미군정에 의해 임명된 경찰과 대립하게 되었다.

③ 보수청년조직의 활동

함양 지역에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보수청년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청년단[국청]이 있었는데, 국청계인 김경도가 함양의 제헌국회의원이 되기도 하였다. 1946년 11월 23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함양지부가 결성되고 그 산하에 청년부가 만들어졌다. 청년회에서는 반공사상에 투철한 단원 50명을 특공대로 편성하였다. 이들은 합숙훈련을 거친 다음 경찰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정보제공과 지리안내 등을 맡았다. 이 외에 한국광복청년회, 대한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함양민보단 등이 함양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2. 한국전쟁 이전 함양 지역의 빨치산 활동

① 여순사건과 빨치산 활동

1948년에 들어와 미국과 이승만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추진하자,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투쟁이 남한 전역에서 벌어졌다. 여순사건이 실패하자 주모자인 김지회, 홍순석은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이들은 유격근거지를 구축하고 병력을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운산 일원에 분산 은거시켜 장기 항전을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어나갔다. 이들은 준비된 근거지를 전전하면서 구례·곡성·광양·무주·장수·남원·거창·함양·산청·함양·진주·하동 등지에 출몰하였다.

『함양군지』뿐만 아니라 『마천향토지』에도 여순사건과 관련된 빨치산 활동이 기록되고 있다. 함양군 마천면 지역에 여순사건의 여파가 미친 것은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 만인 12월 19일이었다. 김지회와 홍순석은 지리산을 넘어와 삼정리 양정부락을 통해 마천으로 내려왔다. 토벌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마천면휴천면에 불탄 가옥은 251호였다. 토벌 군경들은 마천면에서 얼음터, 칠성이, 셋방동, 성안 등 빨치산의 아지트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자연 마을을 모두 강제 소개시키고 불을 질러, 그 이후부터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좌익에 관련된 이들에 대한 숙청작업도 있었다. 마천에서도 10여 명이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② 군경의 빨치산 토벌 작전

육군본부는 1948년 10월 30일 여수에 있던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부 예하 작전부대를 주축으로 호남방면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한 달간 토벌 작전을 수행하다가 1948년 11월 30일 해체하였다. 이에 지리산 지역의 빨치산들은 이전의 활동 범위였던 구례·하동 일대에서 벗어나 전라남도·전라북도의 동부지역과 경상남도 북서부인 산청·함양·거창군 그리고 진주 부근까지 행동반경을 확대하였다.

1949년 3월 1일에는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로 개편하였다. 지리산 전투사령관 정일권 준장은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의 작전은 3단계로 수행되었다. 1단계는 남원·구례·화개장·하동·진주·산청 지역에 분산배치하여, 1주일간에 걸쳐 수색작전을 전개하여 공비들을 지리산으로 내몰았다. 2단계는 야산지대에 산재한 빨치산을 지리산으로 몰아넣은 다음 이들을 격멸하는 작전이었다. 3월 11일부터 개시하였다. 3단계는 3월 16일부터 거창·함양 등지로 도주한 빨치산을 색출하고 소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성과가 미흡하자 육군본부는 1949년 9월 28일부로 다시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를 남원에 설치하고, 사령관에 김백일 대령[제5사단장]을 임명하였다. 이후 10월 30일부터 1950년 2월 28일까지 민심수습, 사상 선도, 농촌재건 촉진, 원호사업을 병행한 소탕작전을 실시하였다.

[한국전쟁과 함양 지역의 피해]

1. 함양 지역과 한국전쟁

함양군민들은 인민군이 각기 자기 마을에 들어온 날짜를 기점으로 ‘사변 전(前)’과 ‘사변 후(後)’로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날짜는 1950년 7월 26일~7월 29일 사이다. 기억하는 날짜가 다른 것은 함양군 내에서도 인민군이 진격해 들어온 것이 지역마다 날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함양군에 처음 인민군이 들어온 것은 1950년 7월 26~27일로 부대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 소장]이었다. 4사단은 26일 전라북도 장수군에 도착하여 27일 새벽에야 육십령을 넘었다.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2』에는 “4사단은 충청남도 금산과 전라북도 무주를 거쳐 7월 27일 경상남도 거창 방면으로 육박하였다. 이때 사단은 제109전차연대가 같이 공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함양에 진격한 인민군은 29일까지 함양군 전역을 점령하였다. 함양을 인민군이 점령하였던 시기는 대략 2개월이었다. 『함양군지』에 의하면 국군에 의해 수복되는 9월 28일까지 빨치산의 하산으로 군과 읍·면·리 단위까지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사상 교육과 무상몰수 무상분배에 따른 토지개혁, 현물세 징수, 의용군 할당 모집, 인민재판과 우익인사 학살 등이 발생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함양 지역뿐만 아니라 어느 점령지역이든 비슷하였을 것이다.

2. 인민군의 퇴각과 군경의 빨치산 토벌과정

9월 28일 이후 퇴각하던 인민군 6사단과 7사단 병력 중 상당수가 지리산덕유산 등지에 입산해 기존의 빨치산과 합류한다. 이에 육군본부는 10월 초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을 호남지역에 투입해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11사단은 곧이어 10월 15일 후방지역 작전을 담당하게 되는 3군단에 배속되어 호남지역과 함양·산청 등 서북부 경상남도 지역의 빨치산 토벌을 계속하게 된다.

11사단은 1951년 3월 말까지 약 6개월 동안 이 지역 토벌 작전을 수행하면서 1951년 2월 7~11일까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휴천면·유림면 일원에서 705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거창군 신원면에서도 719명을 학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산청·함양·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을 저지른 부대는 9연대[연대장 오익경]와 3대대[대대장 한동석]였다.

이 시기 빨치산은 6월에 접어들면서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조직을 강화하는 등 전투력 보강을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이현상의 남부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의 공세가 활발하였다. 1951년 7월 15일에는 경찰관 30여 명[당시의 경찰 측 발표로는 28명]이 전라북도 장수군과 경상남도 함양군 사이의 육십령에서 전투 중 빨치산에게 항복하였다가 풀려난 일도 있었다.

이러한 빨치산의 공세로 경찰의 피해가 막대하였다. 빨치산의 공세가 심해지자 1951년 11월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다시 2개 사단을 편성하고 지리산지구에 투입하였다. 투입한 부대는 ‘백야전 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 소장]’였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12월부터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시작하였고, 1952년 3월 14일까지 3개월 보름간에 걸친 토벌은 빨치산 세력을 급속도로 약화시켰다. 백야전 전투사령부는 3월 14일까지 작전을 마치고 해체되었다.

1952년 7월 10일 전방의 전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국군은 1사단[사단장 박임항 준장]을 전라북도 남원으로 이동시켜 8월 4일까지 약 20일간 토벌 작전을 벌였다. 이후 경찰과 분리된 남부지구 경비사령부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가 1954년까지 빨치산 토벌을 계속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이현상이 사살되었다. 11월 28일에는 산청군 지리산 상봉골에서 이영희가 대원 62명과 함께 사살·궤멸되었다.

그러나 국군은 1953년 12월 5사단장 박병권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박 전투사령부’를 추가 편성하였다. 이에 남부지구 경비사령부와 서남지구 전투경찰대를 예하에 두고, 1954년 5월 25일까지 166일간에 걸쳐 남은 빨치산에 대한 소탕 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1954년 1월 경상남도당 위원장으로 전임되어 있던 조병하[전 전라북도당 부위원장]가 국군 5사단 토벌대에 의해 지리산 조개골에서 생포되었다. 1월 15일에는 팔공산에서 마지막까지 빨치산 투쟁을 벌여온 함양 출신의 남도부[하준수]가 대구 시내에서 특무대에 의해 체포되면서 사실상 빨치산은 소멸되었다.

3. 빨치산 토벌과정에서의 민간인 전시동원

전쟁 시기 함양군민들은 불법 처형[학살] 못지않게 공비토벌 과정에서 의용 경찰[특공대]로 참여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향토방위대로 불리다 언제부터인지 특공대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함양에서만 최소 1,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특공대라는 이름의 의용 경찰로 차출되어 빨치산 토벌에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5~6년까지 향토방위대 또는 특공대라는 이름으로 복무하였으나, 군 복무 경력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징집 연령이 된 이들은 별도로 군대에 입대하기도 하였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의 특공대만 해도 120~130명이나 되었는데, 비호대·돌격대·청룡대와 함께 1·2·3대대의 조직편대까지 갖추고 있었다. 마천면뿐 아니라 휴천면도 특공대의 수가 12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1. 한국전쟁 이전의 민간인 희생

1946년 ‘10월 인민항쟁’과 1947년 ‘7·27인민대회’, 1948년 ‘2·7구국투쟁’ 등 좌익계열의 투쟁을 계기로 경찰과 우익단체에 의한 좌익인사 학살이 줄을 이었다. 경상남도 함양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때의 가해자는 군인이 아닌 경찰이나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였으며, 집단학살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학살이었다.

군인에 의한 집단학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이후 토벌군에 쫓겨 지리산덕유산 일대로 입산해 빨치산 투쟁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경찰과 우익단체 간부들이 빨치산에 의해 학살되는 사건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여순사건으로 구성된 빨치산에게 민간인이 희생된 첫 사례는 1948년 12월 19일 마천면 소재지인 땅벌[당흥]마을에서 전매국[연초조합] 직원들이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하였다. 경찰과 토벌군[3연대]은 자신들이 빨치산에게 당한 것을 보복이라도 하듯, 수없이 많은 민간인을 빨치산과 내통하거나 식량을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집단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빨치산의 보급 투쟁 근거지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마을을 불태워버린 경우도 허다하였다. 마천면휴천면에서는 불탄 가옥만도 251호였다고 『마천향토지』는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수동면 도북마을과 내산마을[치라골]에서도 각각 32명과 17명을 학살하였으며, 이들 마을 역시 불태워졌다. 백전면 백운리 신촌마을운산리 중기마을에서도 각각 9명과 12명이 경찰에 붙들려가 경찰과 군인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이처럼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도주한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의 군경에 의한 학살은 마천·수동·백전·휴천·서하·지곡면 등 함양군 전역에 걸쳐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마천향토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순 폭동사건과 6·25전쟁 중에 빨치산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주민들의 숫자보다 아군에게 죽임을 당한 주민들의 숫자가 많았다”면서 마천에서도 여순사건 후 10여 명이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는데, “당시는 이승만 정권에 찬동하지 않는 이들도 빨갱이로 매도하였고 또한 확증도 없이 좌익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씌워 처형시킨 예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2.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

함양은 다른 지역에 비해 보도연맹원 또는 요시찰 대상자의 희생은 적은 편이다. 이는 세 가지 이유로 분석해볼 수 있다. 첫째, 한국전쟁 이전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인해 지리산에 입산한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민간인을 빨치산과 내통 또는 부역한 혐의로 학살해버렸기 때문이다. 즉 보도연맹 가입대상자 및 전쟁 발발 이후 예비검속 대상자가 타 지역에 비해 적었다. 둘째, 함양은 전라도와 인접해 있었던 지형적 이유로 경상남도 지역 중 가장 빨리 인민군이 들어왔다. 7월 27일에 인민군이 함양으로 들어왔는데, 이는 진주보다 나흘이나 빨랐다. 이에 따라 경찰이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거나 처형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였고, 후퇴하느라 우왕좌왕하는 과정에서 미처 처형하지 못하고 떠났다. 셋째, 함양의 예비검속은 약 2~3차례에 의해 이뤄졌는데, 1차는 비교적 좌익혐의가 뚜렷한 요시찰 인물이거나 좌익인사의 가족들이었고 대부분 학살되었다. 하지만 2차, 3차 소집 시기는 이미 진격해오는 인민군을 맞아 군과 경찰이 전투에 투입되고 있었으므로, 당시 소집된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대부분 해당 지역의 경찰지서에 일임되었다. 따라서 평소 지역민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던 해당 지역 지서장과 순경들이 학살을 회피하거나 의도적으로 살려준 경우도 있었다.

3. 군경토벌과정의 민간인 희생 - 함양·산청·거창 민간인학살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휴천·유림면 그리고 거창군 신원면에서 1,424명의 민간인이 빨치산에 협력하였다는 명목으로 11사단[사단장 최덕신]과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 가운데 산청·함양의 희생자가 705명, 거창이 719명이다. 학살 기간은 산청·함양은 1951년 2월 7일, 거창은 2월 9~11일의 일이다. 이 사건은 그동안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진상이 거의 밝혀졌다.

4.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

빨치산과 지방 좌익으로부터 학살당한 사례이다. 인민군이 주둔하던 2개월 동안, 인민군이 민간인을 직접 학살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다만 인민군의 의용군 강제할당에 따른 희생이 많았다. 그중 상당수는 이후 인민군 후퇴 시 탈출해 돌아왔으나, 끝내 행방불명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인민군에 의한 대표적 학살은 1950년 9월 인민군 퇴각 당시이다. 우익인사와 경찰, 공무원 등 300여 명이 함양군 서하면 다곡리 대황마을 대황재서상면 육십령에서 희생되었다.

빨치산에 의한 학살은 1951년 9월 2일부터 나흘간 벌어진 ‘9·2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빨치산과 마천지서 경찰 및 의용특공대의 대충돌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특히 삼정리에서는 1951년 9월 5일경 나흘간의 공방이 있었다. 공방 끝에 면 소재지를 점령한 빨치산에 의해 김영수 등 마을 주민 6명과 군인 등 모두 12명이 붙잡혀, 삼정리 하정마을 앞 돌팀이[하정솔숲, 선유정]에서 집단학살을 당하였다.

[함양 지역 집단학살 유해매장 추정지]

함양 지역에는 민간인 학살지로 추정되는 곳이 많지만, 대표적인 장소는 다섯 곳 정도이다. 봇골과 당그래산[함양읍], 서주강변[유림면], 본통고개[수동면], 대황재[서하면], 육십령[서상면] 등이다. 증언자들에 의하면 함양읍 봇골에서만 줄잡아 100여 명에서 16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당그래산은 함양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으로 알려져 있는 수동면 도북마을 집단학살 사건을 비롯해서, 수동면 죽산리 내산마을 치라[락]골 주민 18명도 이곳에서 집단학살을 당하였다. 전쟁 직후 보도연맹 가입자 집단학살을 비롯해 수차례 당그래산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서주강변에서도 인근 모실·손곡·서주·자해·주산에서 모은 사람들 217명[『휴천면지』]이 학살을 당하였다. 수동면 화산리의 본통고개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최소 130~140여 명에서 최대 200~300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하면 다곡리대황재서상면 상남리 육십령은 인민군들에 의한 집단학살지다. 대황재에서는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경찰이나 군인, 공무원 등 우익인사 및 그 가족 등 소위 반동분자를 최소 250여 명에서 300여 명을 트럭에 싣고 와 집단학살하였다. 대황재에서는 집단학살 이전의 군경에 의한 학살 사례도 나타난다. 육십령에서도 이 지역을 점령한 인민군들에 의해 대한청년단원과 군경가족 등 300여 명이 학살되었다.

[함양 지역 민간인 희생의 원인]

한국전쟁 중 함양군에서의 민간인 희생에 대한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인구 변화가 희생자 수 추정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함양군지』에 의하면 한국전쟁 전 함양군의 인구는 1949년 10만 2,184명이었고, 전쟁이 종료된 1953년에는 9만 8,784명이었다. 약 3,400명이 줄어든 데에는 학살된 민간인의 수도 포함되었겠지만, 빨치산의 잦은 출몰과 토벌과정에서 벌어진 희생과 공포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것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함양 지역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 함양 지역의 지역적 조건이다. 함양은 지리산에서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산자락에 있어 한국전쟁 이전부터 빨치산들의 거점이 되어왔다. 여순사건 이후 군인들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였으며, 한국전쟁 중에도 후퇴하지 못하였던 인민군들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벌였다. 이에 지리산과 접해 있는 함양 지역 사람들은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함양 지역은 말 그대로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었던 것이다.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빨갱이에 동조하였다는 이유와 빨갱이라는 이유로 죽음으로 내몰렸다.

둘째, 여순사건 이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빨치산에 대한 토벌이 매우 강고하게 진행된 결과였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규 군대를 이용한 빨치산에 대한 토벌은 계속되었고, 그 방법도 매우 잔인하였다. 1950년 10월 15일 3군단이 후방 치안 유지를 위해서 창설되었다. 예하에 2·5·9·11사단이 배속되었고, 제11사단에는 제9연대·제13연대·제20연대가 배속되었다. 그중 11사단이 산청·함양사건과 거창사건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함양 지역의 민간인 피해가 많이 발생한 이유는, 이들이 겪은 전쟁의 기간이 너무 길었다는 것이다. 함양 지역의 민간인들이 고통을 겪은 시기는 1948년 여순사건부터 한국전쟁 기간까지와 빨치산이 완전히 소탕되는 1954년까지였다. 아니면 마지막 빨치산 2명[정순덕, 이홍희]이 산청군 삼장면에서 1963년 11월 18일 사살될 때까지 함양 지역은 전쟁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길었던 전쟁에 대한 인식은 향토사 서술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 함양이 경험한 전쟁은 3년이 아니라 더욱 길었었고 어느 지방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왜냐하면 함양은 지리산덕유산이 있고, 이 양대산을 잇는 연봉의 산세가 깊어서 빨치산 공비들이 은거하기에 알맞아 그들의 본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부터 6·25동란을 지나 1956년 말까지 8년간을 공비들에게 시달려 왔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양다리 속에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쓰라림을 겪어 온 고장이기 때문이다.”[함양교회, 『고난과 은총의 길-함양교회 90년사』, 1998, 131쪽]

[위령사업, 어떻게 할 것인가]

1. 현재까지의 상황

민간인 학살에 대한 함양 지역민의 대응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산청·함양유족회 구성으로 나타났다. 1989년 4월 20일 유족들이 모여 ‘가현·방곡·점촌·서주지역 양민학살 유족회’를 구성하여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1990년 3월 15일 산청·함양 양민 사망자 유족회에서는 ‘위령제 및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1991년 4월 27일에는 대외문건으로 ‘탄원서’를 작성하여 정부 요로와 국회와 정당에 보내기 시작하였다.

산청군 의회 강정희 의원은 산청군의회에서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명예회복에 관한 건의안’을 제안·설명하였다. 산청군의회는 1993년 5월 22일에, 함양군의회는 7월 5일 건의안을 채택하였다. 산청군의회는산청·함양사건이 거창사건과 동일 사건이라 규정짓고 특별법안 제정을 동일차원으로 해결해 달라고 건의하였다.

1995년 12월 18일에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 법안’이 국회 내무위원회를 통과하고, 이어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1996년 1월 5일 법률 제5,148호로 공포되었다.

2000년 1월 12일에는 제주 4·3사건 명예회복특별법과 민주화운동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것을 보고, ‘거창 사건 등’에 관한 특별법도 보상법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통비분자 가족으로 낙인찍혀 피해를 당한 유족에 대해 국가가 이에 대한 상응한 명예회복 차원의 보상과 배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04년 3월 2일에는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2004년 3월 23일, 대통령 권한대행 고건 국무총리는 ‘거창사건 등’ 관련법을 거부하고 국회로 돌려보냈다. 이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준공되었다.

2. 앞으로의 과제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해결되지 못한 것은 문제이다. 이 외에도 해결되어야 할 것은 많다. ‘산청·함양사건’과 최근 진실규명 결정이 이뤄진 도북마을과 치라골 사건 외의 다양한 형태로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연구와 조사뿐만 아니라, 유족회 조직이나 진상규명 활동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특히 인근 ‘거창사건’과 동일 사건인 ‘산청·함양사건’의 명예회복 과정에서 좌익사상과의 무관성을 증명하기 위해 ‘양민’을 유난히 강조해온 탓인지, 좌익활동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재판 없이 불법 처형된 민간인에 대해서는 진상규명 요구는 물론 그 필요성조차 제기되지 못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분하에 비무장한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반인도주의적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국가는 유족에 대한 사과와 위령사업지원 그리고 유족에 대한 보상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함양 지역 민간인 학살에 따른 피해는 다양하고도 광범위하다. 따라서 단일사건인 기존의 산청·함양사건, 거창사건과는 다른 위령 사업이 필요하다. 피해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기록으로 남겨야 하며,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수동면 도북사건의 피해당사자이자 함양유족회장인 차용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족들 중에 그래도 밥 먹고 살 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때 아예 가족 전체가 멸족돼버린 집도 두 집이 있고, 서너 집은 유복자로 태어나 이집 저집 다니면서 얻어먹고 사느라 지금도 먹고살기 힘든 사람들이 있어요. 과부가 된 어머니는 (재가를 해) 가버렸고, 그러니 병아리 같은 것들이 이집 저집 얹혀살다 보니 못 먹어 가지고 무슨 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도 몇이 있어요. 그런 자녀들이 출세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번에 나라에서 잘못한 걸 인정하고 사과하겠다면, 그런 정말 어려운 유족들이나마 일자리를 주든지, 생계지원이라도 해주면 그게 정부로서 할 도리가 아니겠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경남도민일보, 2009년 1월 19일 자 17면]

차용현은 모든 유족에 대한 일괄적인 보상보다, 가족의 학살로 인해 아직도 생계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부 유족에 대한 생계지원을 제안하고 있다.

이처럼 함양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민간인 희생자를 위로하고 역사의 기록을 남겨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함양의 대표적 공원인 함양읍 상림공원이나 오도재 지리산조망공원 내에 ‘함양지역 민간인 희생자 합동 위령탑’ 등과 같은 기념물 조성을 통해, 해방 이후 빨치산 토벌 종료 시기에 이르기까지 함양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민간인 희생 사건을 기록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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