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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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勞農黨 |
영어공식명칭 | Independent Labour and Agrarian Party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동석 |
[정의]
1946년부터 1961년까지 경상남도 함양 지역에서 활동한 무정부주의 계열 정당.
[설립 목적]
노동자·농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근로 대중의 최대 복리를 추구하되 경제 운용의 주체로서 중·소 자산층을 활용한 자주계획경제, 민주입헌정치,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변천]
1946년 4월 20일~4월 23일 전국 아나키스트 대표자 대회가 함양군 안의면 용추사에서 개최되었다. 회의 결과 참석자 전원의 찬성을 받은 단주(旦洲) 유림(柳林)[1898~1961]을 중심으로 1946년 7월 7일 서울에서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창당이 선포되었다. 독립노농당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국가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하여 투쟁한다.
1. 우리는 노동자 농민 일반 근로 대중의 최대 복리를 철저히 옹호한다.
1. 우리는 일절의 독재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의 국내외 세력과 평등호조의 원칙하에서 합작한다.
독립노농당은 토지문제에 대해 “자력으로 경작 아니하는 자의 토지는 자력으로 경작하는 자에게 분배하고 소유권을 향유케 함”에 의거하여 자력으로 경작하지 않는 자의 토지는 무상몰수하여, 자력으로 경작하는 자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사유권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유자명(柳子明)[1894~1985],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 박열(朴烈)[1902~1974], 유림 등을 통하여 형성된 한국의 아나키즘 세력은 해방 이후에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승만(李承晩)[1875~1965] 독재와 군사정권의 탄압 속에서 점차 활력을 잃고 명맥만 유지하였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투쟁이 성공을 거두고 소련 및 동유럽권 공산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아나키즘 운동이 부활하여, 1987년 8월 22일 제4차 전국아나키스트 대표자대회가 안의고등학교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아나키스트 인물]
함양군 안의면은 일제와 싸우다 희생된 아나키스트가 많이 태어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이진언(李眕彦)[1905~1964]은 1946년 안의중학교를 설립하였고, 전국아나키스트대회 개최에 적극 참여하였다. 독립노농당 창당을 주도하였으며, 독립노농당 기관지 『독립노농신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하기락(河岐洛)[1912~1997]은 경북대학교 교수로 1987년 8월 22일 제4차 전국아나키스트 대표자대회를 안의고등학교에서 개최하였다. 1990년, 1991년에 아나키즘과 민주사회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주의 정당 결성을 꾀하면서 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유치환(柳致環)[1908~1967]은 경상남도 통영 출신이지만 안의중학교 5대 교장으로 재직하였고, 대표 아나키스트 시인이자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유치환은 부조리한 현실과 맞서는 저항에의 의지, 생명 찬미를 통하여 아나키즘에 바탕을 둔 「깃발」 등 시 작품을 남겼다.
[의의와 평가]
아나키스트들의 자유 의지에 따라 합법이라는 대중 공간에서 창당된 아나키즘 이념 정당이라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