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406 |
---|---|
한자 | 寺刹放火事件 |
영어공식명칭 | Temple firefighting cas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지수 |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지역에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빨치산 토벌을 위해 지리산의 사찰·암자 등을 방화·소개한 작전.
[역사적 배경]
지리산 일대의 함양 지역에는 신라 시대 이후 고려 시대까지 융성했던 불교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사찰과 누각, 암자, 불상 등이 세워졌으며 현재에도 일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신라 시대 사찰로 함양군 휴천면의 엄천사 터[현재 법화암(法華庵)]는 초석과 인탑이 현재 남아 있으며, 안의면의 장수사 터도 일주문(一柱門)[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가운데 첫 번째 문]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사찰인 수동면의 승안사 터와 마천면에 있었던 천룡사 터, 덕봉사 터는 현재 석등, 와당, 마애불, 석탑 일부가 남아 있다. 마천면의 벽송사와 금대암 등도 고려 시대 사찰로 현재 석탑이 남아 있다. 신라 시대 불상으로는 휴천 문수암의 금동여래입상 등이 있으며 고려 시대 불상으로는 수동면 승안사지 석조여래좌상과 마천면 덕봉사지 마애여래입상 등이 있다. 이밖에도 안의군[현 경상남도 함양군과 거창군의 일부 지역을 관장한 조선 후기의 행정구역] 북상면 농산리에 있는 석조여래입상, 위천면 상천리 석조여래좌상 등 많은 불교 유산들이 남아 있다. 불교가 쇠퇴한 조선시대에도 향교, 서원 등이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의 전란으로 많은 문화유적들이 불에 타거나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경과]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후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의 퇴각명령이 내려졌으나 남쪽의 전투병력 중 북한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등에 들어가 기존의 지역 좌익들과 함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이 되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었는데 주로는 사찰들을 본거지로 삼아 일종의 ‘빨치산 통로’를 연결한 해방구를 만들고 대부분 밤시간을 이용해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은 지리산 일대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빨치산의 본거지인 사찰들을 방화하여 소개하는 작전들을 펼쳤다. 대표적으로는 1951년 2월 국군 제11사단 소속 9연대 3대대가 빨치산 보급투쟁을 차단하기 위해 실시한 ‘견벽청야작전’과 1952년 9월 서남지구사령부에 의해 마천 일대에서 전개된 ‘9·2대공세 작전’ 등을 들 수 있다.
[결과]
지리산 일대 빨치산 토벌작전 중 공비들의 본거지로 사용되고 있던 천년 사찰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예를 들어 함양군 마천면에 있는 안국사(安國寺), 벽송사(碧松寺), 금대암(金臺庵), 영원사(靈源寺), 서상면에 있는 영각사(靈覺寺), 백전면에 있는 상연대(上蓮臺), 안의면에 있는 용추사(龍湫寺) 등의 고찰들이 빨치산 통로에 포함되어 방화,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의의와 평가]
함양군 일대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국군 작전으로 소실된 사찰들 중에는 신라 시대 이후 중건되어 보존가치가 매우 큰 사찰들이 많았다. 특히 영원사(靈源寺), 벽송사(碧松寺), 영각사(靈覺寺) 등은 보존가치가 매우 큰 사찰들로 현재도 보물과 민속자료, 유형문화재 등을 보유하고 있어 절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