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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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陽山淸民間人虐殺事件 |
영어공식명칭 | Hamyang-Sancheong Massacr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고지수 |
종결 시기/일시 | 1951년 2월 7일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유림면 서주리 서주 마을 민간인 집단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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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방곡마을 |
종결 장소 |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서주마을 |
종결 장소 |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오봉로 530 |
성격 | 민간인 학살 사건 |
관련 인물/단체 | 국군11사단|9연대 3대대|최덕신|오익경|한동석 |
[정의]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함양군 일대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0년 9월 25일 빨치산 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중장)이 창설되고, 9연대장에 오익경 대령, 3대대장에 한동석 소령이 임명되었다. 사단 사령부 및 9연대·13연대·20연대 등은 미 9군단장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1950년 11월 29일 남원에서 열린 사단본부 참모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리산 고동재를 넘던 미 군사고문단의 리 대령과 장교 2명, 사병 28명이 적에게 공격당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 11사단 9연대는 공비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된다. 이후 남원 지휘관 회의에서 대대적인 공비토벌과 초토화 작전이 수립되었다.
[경과]
1951년 2월 5일 국군 11사단 9연대장 오익경과 3대대장 한동석이 경찰을 포함한 청년방위대로 편성된 1개 중대 총 700명을 이끌고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으로 진격하였다. 1951년 2월 7일 공비토벌 연합 작전인 이른바 ‘견벽청야작전’[작전명령 제207호]의 수행을 위해 산청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제1진은 산청 방면, 제2진은 함양군 유림 방면, 제3진은 함양군 마천 방면에서 진격하기 위해 지리산 주변에 있는 산청군 금서면 일대와 함양군 휴천면 점촌 및 유림면 일대에 집결하였다. 이때 3대대장 한동석은 함양읍 수리조합에 휴천면 정종옥, 휴천지서장 최시문, 국민회 휴천지부장 박복원, 유림면지서장 송효상, 금서면 화계주재소장 박동춘 , 거창 신원면지서장 박경위 등을 긴급회의로 불러 공비와 내통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의 명단을 제출하도록 요구하였다. 최시문 증언에 의하면 각 면에 할당된 명단은 휴천면 1,000명, 유림면 300명, 금서면 500명, 신원면 800명 등이다. 박동춘·박복원·최시문·정종옥 등은 명단 제출을 거부하였으나 유림지서장 송효상이 15명의 명단을 제출하였고 명단에 있는 민간인들은 통비분자로 간주되어 모두 죽음을 당했다.
1951년 2월 8일에는 산청 금서면을 지나 8시에 가현마을에서 90명, 10시 방곡에서 180명, 12시 점촌에서 42명 등 모두 312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으며, 모실·송곡·서주·자해·주산에서 217명을 모아 오후 6시에 학살하였다. 휴천면에서도 같은 시간 문하마을과 동호마을에 주민 600명이 소집되었으나 박복원의 희생적인 간언으로 학살을 면하였다.
[결과]
함양 산청 민간인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중 빨치산 토벌작전을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다수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처참히 학살당한 사건이다. 민간인 집단 학살에 동원된 무기는 기관총, 소총, 수류탄, 유류(기름) 등으로 비무장한 민간인들에 대해 참혹한 학살이었다.
[의의와 평가]
1996년 1월 5일 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 결정으로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되고 위령탑이 세워졌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무고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한편 이곳을 찾는 시민들에게 평화와 인권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