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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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希亮-亂 |
영어공식명칭 | Jeong Huilyang’s revolt |
이칭/별칭 | 무신란,이인좌의 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728년 3월 21일 - 정희량의 난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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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728년 4월 - 정희량의 난 종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728년 3월 15일 - 충청북도 청주성에서 이인좌의 난 발생 |
발생|시작 장소 | 정희량의 난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
종결 장소 | 우지치 - 경상남도 거창군 |
성격 | 반란사건 |
관련 인물/단체 | 정희량|이인좌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에서 정희량이 일으킨 난.
[개설]
정희량(鄭希亮)은 정온(鄭蘊)의 현손이다. 본명은 준유(遵儒)이며 참봉(參奉) 중원(重元)의 둘째 아들이다. 안의의 사족으로 노비와 전택이 많았다. 당시 붕당의 전개 양상에서 남인을 실각시키고, 그들을 처벌하는 경중에 따라 서인 내에서도 노론과 소론의 입장 차가 있었다. 재야의 남인들과 소론 계열에서는 노론 세력들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정희량은 집권 노론 세력에 상대적인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희량은 이인좌(李麟佐)와 서로 약속하여 1728년 3월 21일에 함양군 안의현에서 기병(起兵)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삼가를 장악하였다. 당초의 계획대로 이인좌의 군대와 합세하려고 했지만 관군의 반격으로 실패하여 체포되어 처형당하였고, 난은 평정되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 후기 붕당의 과정은 남인과 서인과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북인 정치세력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북인들의 거주지였던 경상우도 출신 사족들은 중앙 관직으로 진출이 제한되었다. 서인들이 일당지배체제를 형성하는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은 완전히 실각하였다. 서인 주도 상태에서 경종의 즉위로 서인 내에서 분열된 소론이 잠시 집권하였다. 하지만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노론의 추대를 받았던 영조가 즉위하면서 서인의 노론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에 불만을 가진 소론 과격파와 재야의 남인들이 모의하여 정희량과 이인좌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하였던 사건이다.
[경과]
정희량의 부친인 중원은 말년에 경상북도 순흥으로 이주하였다. 정희량은 당시 순흥에 살면서 이웅좌와 안동에서 만나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순흥에서 우도로 와서 각지의 동조자들을 모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에서 기병하였다. 정희량의 기병에 앞서 1728년 3월 15일에 청주성에서 이인좌가 기병하였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조기에 진압하고, 이인좌 난을 소탕한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에게 지시하여 정희량의 난을 진압토록 하였다.
정희량의 반군들이 안음현 관아로 들어가니, 현감 오수욱(吳遂郁)은 도망을 갔다. 또 거창현감 신정모(申正模)도 도주하였다. 정희량은 함양군으로 들어가 장차 전라도 경계를 넘으려 하였다. 그러나 운봉영장(雲峰營將) 손명대(孫命大)가 이 상황을 알고 급히 속읍의 군사를 동원하여 먼저 팔량령(八良嶺)을 점거하였기 때문에 넘지 못하고, 함양군에서 하루를 머물다가 경상남도 거창군으로 돌아갔다. 거창군으로 돌아온 정희량은 생초역(省草驛)에 둔을 치고, 장차 무주(茂朱)로 향하려 하였다. 그런데 선산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이 금오진(金烏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지령의 험한 곳을 먼저 점거하고, 무주의 고갯길 또한 전라도의 군사가 점거하여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결과]
정희량은 관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거창군 경계의 우지치(牛旨峙)에 둔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선산부사 박필건이 우지치의 요해처를 먼저 점거하였다. 1728년 4월 초에는 관군들이 포위망을 좁혀 오면서 이보혁(李普赫)과 정양빈(鄭暘賓)은 이미 경상남도 합천군을 수복(收復)하고 거창군으로 진군하였다. 이석복(李碩復)과 우하형(禹夏亨)도 경상남도 진주시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에 박필건은 아전 김진평(金鎭平)을 시켜 적진에 들어가 장졸과 더불어 깃발을 휘둘러 신호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자신이 선봉이 되어 깃발을 휘두르면서 진격하여 정희량의 군세를 괴멸시켰다. 정희량을 포함하여 주모자 20여 명을 체포하고 처형하면서 난은 진압되었다.
[의의와 평가]
함양군 안의현은 1728년에 정희량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한 고을이었기 때문에 그해 7월에 안의[안음]현을 혁파하여 함양부(咸陽府)에 소속시켰다. 혁파한 7년 후에 민간의 폐단을 우려하여 복현을 요청하였으나, 정희량의 반역의 엄중함을 이유로 복호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736년(영조 12)에 명유(名儒)가 살았던 고을이고 영남·호남의 요해처이니 복현하는 것이 합당하겠다고 하는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의견으로 복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