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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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希南-晋州城戰鬪 |
영어공식명칭 | Jinjuseong battle of Oh Heenam |
이칭/별칭 | 2차 진주성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593년 6월 21일 - 2차 진주성 전투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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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593년 6월 29일 - 진주성의 함락과 오희남의 전사 |
전개 시기/일시 | 1593년 6월 26일 - 왜적들이 10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기 시작 |
발생|시작 장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
종결 장소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오희남 |
[정의]
1593년 6월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 출신의 무장 오희남이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했던 사건.
[개설]
오희남은 경상남도 안음현 모동리 무월 출신[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으로, 함양오씨 성재공(誠齋公)의 현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95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수문장으로 항전하다가 진주성 함락과 함께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선무원종공신 2등에 책봉하였다. 헌종 때에는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에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전라도로 향하는 길목인 진주를 공격하면서 발생한 전투이다. 진주대첩의 보복을 위하여 집요하게 진주성 공략을 준비한 왜군은 10만 병력과 800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함안·반성·의령을 차례로 점령하고 진주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진주성 전투는 왜란이 발발한 1592년 가을의 1차 전투와 이듬해 1593년 여름의 2차 전투로 전개되었다.
[경과]
왜군 약 3만 명이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나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왜적이 패퇴하면서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아군이 승리하였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차 진주성 전투의 복수를 명목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1593년 6월 21일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재개되었다. 당시 오희남은 진주성의 수문장으로 용맹을 떨쳤다.
[결과]
왜적이 진주성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기 시작할 때, 오희남은 진주성의 입구를 수호하는 수문장으로 성문을 방어하였다. 오희남을 중심으로 진주성을 사수하고자 하는 군관민의 결사항전과 강력한 기세에 눌려 왜적들은 성문 공격을 포기하고 인해전술작전을 전개하였다. 1593년 6월 26일에 왜적들은 10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기 시작하였다. 병력의 규모면에서도, 무기와 화력면에서도 열세인 상황에서 군관민은 오희남을 중심으로 10여 일간 필사항전을 펼쳤다. 그러나 1593년 6월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고, 수문장이었던 오희남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군관민 6만여 명이 전사하거나 살해당하였다.
[의의와 평가]
왜적과 전쟁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진주성의 수문장으로서 오희남을 비롯한 군관민이 보여 준 순국과 헌신은 함양인의 구국정신과 애국의 실천을 그대로 보여 준다. 진주성이 함락된 후 왜군은 전라도로 진군하여 전라남도 구례군까지 진출하였으나 전력의 약화로 전라도 진출은 포기하고 1593년 7월 14일에 철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