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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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典韻文 |
이칭/별칭 | 문학,운문,고전,시조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대/고대,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이재용 |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전해지는 운문의 형식을 구비한 작품.
[최치원의 작품과 군산]
『삼국사기』 열전에 의하면, 최치원(崔致遠)[857~?]의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으로, 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집안 계통은 알 수 없다”는 구절을 근거로 연구자들은 최치원의 집안이 육두품일 것이라 추측했다. 12세에 당에 유학하여 18세에 빈공과에 급제, 20세에 율수 현위를 지내고 23~27세에 절도사 고병(高騈)의 막하에 있었다. 이 시기에 유명한 「격황 소문(檄黃巢文)」을 지었다. 28세에 당나라 사신의 자격으로 귀국하여 한림 학사로 등용되고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0세 이후의 기록이 전하지 않아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귀국 후 헌강왕에게 바쳤다는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네 승려를 위해 지었다는 비문인 『사산비명(四山碑銘)』, 그리고 『동문선』에 수록된 146편의 시가 전한다. 시의 주제는 다양하나 그의 생애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작품으로는 배타적인 당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낸 「진정상태위(陳情上太尉)」,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꽃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한 「촉규화(蜀葵花)」, 민중 생활에 대해 관심을 보인 「강남녀(江南女)」, 가야산에 은거한 후의 시편으로 보이는 「추야우중(秋夜雨中)」 등이 있다.
군산과 관련하여 최치원이 거론되는 것은 최치원의 출생지에 대한 의문과 군산에서 전해지는 전설 때문이다. 최치원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호남 옥구, 경주 사량부 『삼국사기』, 경주 본피부 『삼국유사』의 세 가지 설이 경합하고 있다. 이 중 옥구 출생설은 조선 정조 때의 서유구(徐有榘)가 「교인계원필경집서(校印桂苑筆耕集序)」에서 추측한 것이다. 이능화는 조선 정종 때 서모인(徐某人)이 최치원의 전기를 썼는데 최치원을 고군산인(古群山人)이라고 했다는 기록을 『조선무속고』 제 19장 ‘고군산 최고운 신사(神祠)’에 남겼다.
최치원이 군산 사람이라는 설은 그동안 그리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계속 제기되는 이유는 있다. 군산 지역에 최치원에 대한 설화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헌용의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소고」에 나오는 ‘까침 바위’에 대한 전설 등이 최치원과 관련되어 군산 지역에 전해 내려온다.
[고려 시대 군산 지역의 고전운문]
이규보(李奎報)는 군산 출신의 문인은 아니다.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인으로 대내외적인 전란과 폭동의 시대를 살면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라는 문집을 남겼다. 고구려의 시조를 그린 서사 「동명왕편」과 문집에 실린 여러 편의 시로 시대와 역사를 노래했다. 그와 군산을 중심으로 한 전북 지역과의 연계는 30세 초반에 있었다. 처음 관계에 진출한 1199년에 전주로 부임한 후, 이규보는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만경, 임피, 옥구 등을 들렀고 그와 관련한 시문을 남겼다. 『동국이상국집』에 전하는 시 중 군산과 관련이 깊은 작품으로는 「재입 임피군(再入臨陂郡)」, 「차운고선생항중헌염찰윤사업위병서(次韻高先生抗中獻廉察尹司業威幷序)」, 「주필하고선생택겸서염찰명구지의(走筆賀高先生宅兼敍廉察命構之意)」가 있다. 또한 당시의 기록으로 「남행 월일기」도 남겼다.
고영중은 고려 의종 때 군산 옥구 사람으로 옥구 고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국자지공지기(國者至公之器)」로 성균시에 장원 급제한 인물로,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국자감시의 시관(試官)이 되어 인재를 뽑을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동문선』에 「국자지공지기」에 수록되어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최당, 장백목, 백광신, 이준창, 현덕수, 이세장, 조통 등과 해동 기로회(海東耆老會)를 만들어 말년을 보냈다. 1209년 이원로가 작성한 묘지명이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상리 태봉동에 남아 있다.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는 군산 출신은 아니지만 군산에 관한 시를 썼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의 임피현조에는 타지에서 온 사신의 신분으로 낯선 임피의 풍경을 노래한 시가 실려 있다.
김희제는 고려 고종 때의 무인으로 『고려사』에 군산도(群山島) 출신이라 기록되어 있다. 몽고 사신의 거만한 행위나 금나라 원수의 노략질에 단호하게 대처한 애국적인 인물이다. 의주 분도 장군으로 재직할 때 금나라 원수 우가하가 노략질을 하자 판관 예부 원외랑 손습경과 감찰어사 송국첨을 이끌고 우가하가 은거한 석성을 토벌하였다. 청로진으로 돌아오던 길에 지은 「과청로진(過淸虜鎭)」이라는 시를 지었고 손습경, 송국첨이 답시를 지었다. 이 시들은 『고려사』와 『동문선』에 실려 있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인 정구와 허주는 『신증 동국 여지 승람』 옥구현조에 연구(聯句)가 실렸는데, 「수고와변성(戍鼓臥邊城)」, 그리고 「장강경면평(長江鏡面平)」이다. 기타 내력이 불분명한 박경이라는 인물 역시 『신증 동국 여지 승람』 옥구현조에서 “땅이 끝나니 삼면이 좁고 / 호수가 머니 양쪽 변이 평평하다”라고 군산의 풍경을 노래했다.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의 고전 운문]
조선 시대 군산 지역의 문인의 작품이나 군산 지역을 노래한 시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군산 시사의 활동이 알려졌다. 유학자들의 모임이었던 군산 시사는 한시 창작 단체로 광복 이전까지 모임을 계속했다고 알려져 있다.
군산 문인 협회의 창설에 관여했다고 알려진 차칠선(車七善)은 일제 강점기 후반기에 현대 시조를 창작했다. 현재 최영 시인의 소개로 「산촌 야로」라는 작품이 알려져 있다. 군산 시사라는 한시 모임과 차칠선의 현대 시조는 일제 강점기 이후 군산에서 창작 활동이 지속되었음을, 그리고 작품 발굴이 시급함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