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B01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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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ㆍ서당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자현 |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이자 마을 수호신인 당산에 제물을 바치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마을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면서 중단과 복원을 반복하다 지금은 중단되었다.
진마마을 사람들은 언제부터 당산제를 지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도 모셨으니 아주 오래 전부터 모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마다 모셔 오던 당산제는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 당산숲에 있던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버리면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마을의 젊은이들이 까닭 없이 하나 둘 죽어 나갔다. 그것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다시 당산제를 지내기로 의견을 모았고, 1년 중 가장 깨끗한 정월 보름으로 날을 정해 다시 당산제를 모시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시 모시게 된 당산제도 얼마 못 가 다시 중단되었다. 1970년대 말 새마을 사업을 하면서 다시 당산나무를 베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중단된 당산제는 이제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돼지머리와 떡시루를 제물로 올리고]
진마마을 고샅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가면 느티나무로 이루어진 당산숲이 나온다. 이 당산숲의 나무들은 당산제를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김수성[1947년생] 씨의 작은아버지가 심은 것으로, 수령은 95년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젯밥을 받아먹던 본래의 당산나무는 당산숲 옆 하천가에 위치한 큰 느티나무였다. 마을 사람들은 수령이 수백 년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새마을 사업을 할 때 마을 하천을 정비하면서 베어 내서 지금은 밑동만 남아 있다.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먼저 제주를 뽑은 뒤, 그에게 제사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맡겼다. 제주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초상이 났거나 출산을 한 집에서는 제주를 맡지 못했다.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사람이 맡았다. 당산제를 지내기 전날에는 당산과 제주 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궂은일을 당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다. 당산제를 지내는 시간에는 개가 짖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단속했다. 그야말로 조용하고 엄숙하게 모셨다.
제물의 경우 돼지머리와 떡은 빠뜨리지 않고 올렸다. 떡은 팥떡을 만들어서 시루째 올렸다. 촛불이 귀했던 시절에는 떡시루 안에 참기름 종지를 넣고 한지를 돌돌 말아 심지를 만들어 불을 켰다. 제의 절차는 집안 제사와 비슷하게 유교식으로 지냈고,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에게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축문을 읽었다.
이렇게 제의 절차가 다 끝나면 음복을 하고 제사상에 올렸던 떡은 제장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당산나무에는 볏짚으로 20㎝ 정도 굵기의 줄을 감아 놓았다가 이듬해에 여전히 그 줄이 둘러져 있으면 떼어다가 한쪽에서 태우고 다시 새 줄을 감아 두었다.
[당산제가 끝나면 지신밟기를 하고]
당산제를 지내고 나면 지신밟기를 했다. 진마마을 사람들은 농악대가 농악을 치면서 마을을 돌면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농악대는 미리 신청한 집 안에 들어가 지신밟기를 해 주기도 했는데, 마당ㆍ부엌ㆍ장독ㆍ화장실을 두루 돌며 터주신을 위로해 주면 악귀를 물리쳐 집주인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가족의 수명과 건강을 지켜 준다고 믿었다.
농악대가 집 안으로 들어가면 집주인은 마당 한가운데에 주안상을 차려 농악대를 대접했다. 농악대는 마당에서 한바탕 굿을 울린 다음 집안 곳곳을 돌면서 굿을 쳤다. 이렇게 지신밟기가 끝나면 집주인은 정성껏 쌀이나 돈을 내놓았다. 이렇게 걷어진 쌀과 돈은 당산제를 지내는 비용으로 사용되는데, 그것으로 부족하면 마을의 유지들이 쌀을 더 내놓거나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추렴하여 제사 비용을 충당하였다.
[서당마을에서는 짐대를 세우고]
진마마을과 인접해 있는 서당마을에서는 지금도 짐대를 세우고 있다. 진마마을에서 서당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기다란 장대 끝에 커다란 수염을 달고 있는 새가 앉아 있다. 솟대라고도 하는 짐대는 새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장대 끝에 달아 세운 것으로, 서당마을 사람들은 짐대가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막아 준다고 믿는다. 그러고 보면 짐대는 인간의 염원을 하늘에 전해 주는 전령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당마을에서는 정월 열나흗날 오후에 짐대를 만든다. 새의 부리에는 대나무를 활시위처럼 가느다랗게 잘라서 끼우는데, 새가 입에 기다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양과 같다. 이 마을에서도 짐대세우기를 중단한 적이 있었으나, 역시 마을에서 젊은이들이 이유 없이 죽게 되자 의견을 모아 짐대세우기를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