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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1929~1993]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813
한자 金性洙-
영어음역 Gim Seongsu
영어의미역 Gim Seongsu[Great Singer]
이칭/별칭 김이수(金二洙)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판소리 명창
출신지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 356
성별
생년 1929년연표보기
몰년 1993년연표보기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지역에서 활동한 판소리 명창.

[개설]

김성수(金性洙)[1929~1993]의 본명은 김이수(金二洙)이며, 아버지 김용달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5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출신지는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신장리 356번지이다. 영광군에서 곧 가족이 이사하여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에서 자라났다. 김성수의 집안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할아버지 김기운은 대금의 명인이었고, 고모 김추월은 시조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아버지 김용달은 특별히 대가에게 공부를 한 전문적인 소리꾼은 아니었으나, 목소리가 좋은데다 재주가 있어서 ‘들은 풍월’만으로 소리를 하였는데 「심청가」와 「춘향가」 중 이별 대목을 부를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수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교유하였던 소리꾼은 부안 출신의 기교적인 소리꾼 신영채였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김용달은 상당한 수준의 소리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활동사항]

김성수는 아홉 살 때 소리에 이끌렸다. 당시 살았던 마을에 창악인들이 조직한 예술 단체로 지방을 돌며 공연한 협률사가 들어왔는데, 포장을 칼로 찢고 들어가 구경하려다 몰매를 맞기까지 하였으며, 자신이 국악에 포부가 있으니 들어가게 해 달라고 사정해서 결국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박동실, 공기남, 조상선 등이 주축이 된 협률사를 따라다녔다.

김성수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관계로 오른쪽 다리가 온전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실망과 좌절을 맛보아야 하였다. 협률사를 떠난 이후에는 임방울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저 임방울이 좋아서 따라다니며 심부름이나 해 주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임방울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듣게 된다. 당시 고창 흥덕에 살고 있던 김토산에게 찾아갈 것을 권하며 “천추만대에 전할 소리가 있으니 배워 보라”고 한 것이다. 1933년 김토산을 찾아가 「심청가」 전부와 「흥보가」, 「춘향가」, 「적벽가」의 토막소리를 배운 뒤 선운사 동문암에 기식하면서 2년 여를 독공하였다.

독공하기 위하여 선운산 깊은 곳, 일본인이 뚫어 놓은 굴속에 들어가서 여러 달 거처하였다. 그사이에 목이 부어서 똥물도 여러 차례 먹었다고 한다. 이때의 독공은 명창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해 준 계기가 되었다. 김토산에게 배운 소리는 이날치의 소리였다. 이날치박유전에게서 「심청가」를 배우고 공력을 들여 서편제 「심청가」를 완성한 사람으로, 김토산이 바로 이날치의 제자였다. 그 뒤에는 김연수에게 소리를 배우게 된다.

선운사에서 김토산에게 소리를 배운 뒤 스물 예닐곱 되던 해부터 끈질긴 독공의 노력에 힘입어 정읍 신흥동에 있던 정읍국악원의 소리 선생이 되었는데, 당시 김연수는 「춘향가」의 사설을 정리하기 위해 선운사에 내려와 있었다. 김연수선운사에 머물며 사설을 정리하고 있던 3~4개월 동안 김성수김연수를 찾아가 시중을 들었다. 짧은 기간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었으나,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리에 새로운 것을 더하는 형태로 김연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그에게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의 스승은 신영채이었다. 신영채는 아버지와 교유가 있었는데, 활동 지역이 비슷하였기 때문에 자주 접촉하였고 때로는 김성수가 그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기도 하였다. 본래 엿장수이었던 신영채는 목소리가 무척 좋아 근대 5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전도성의 눈에 띄어 뒤늦게 판소리를 한 사람이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전라북도 부안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전라도 청중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던 김성수의 소리는 성량이 작아 무대 소리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방안 소리에는 그보다 한 살 위인 임방울도 함께 소리하기를 꺼릴 만큼 기량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정읍국악원의 소리 선생이 된 이후 그곳을 떠나기까지 17년 간은 그에게 가장 어렵고도 괴로운 시기였다고 한다. 서른 살 때인 1960년대 광주에서 개최된 명창 대회에서 「흥보가」의 박타는 대목으로 1등을 한 것 외에 아무런 영광도 명예도 없는 나날을 보냈다.

판소리가 몰락해 가는 마당에 판소리로 출세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의 생활은 흔적만 남은 몇몇 판소리 애호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어쩌다가 판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의 잔칫집에 초대받아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성수는 마침내 ‘돈이나 벌겠다’며 장사에 뛰어들어 약장사, 과일장사, 소금장사 등을 해 보지만 그마저 여의치 못하였다고 한다. 거기에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17년 간의 정읍 생활을 청산하고 김제로 옮겨 생활하였다.

김제에서는 폐결핵까지 겹쳐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 한동안 술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를 ‘광인(狂人)’으로 지냈다는 그의 술회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운명과의 처절한 대결을 벌였음을 말해 준다. 김성수는 이때 목을 상하여 상청도 많이 줄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김제에 머물며 다시 가정을 꾸미고, 중증의 결핵도 판소리를 좋아하던 한 의사의 도움으로 낫게 되자, 안정을 되찾은 후 당시 곳곳에서 개최되기 시작한 판소리 경연 대회에 자극을 받아 소리를 가다듬고 출전을 하게 되었다.

1989년에는 전라남도 여수의 판소리 애호가들의 요청에 따라 여수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사설 학원을 운영하다가, 「흥보가」, 「심청가」 일부를 녹음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취입을 마치자마자 불의 사고를 당하여 전신마비의 상태로 목숨을 이어가다가, 1993년 가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저술 및 작품]

신나라 레코드사에 의해 「흥보가」 노정기와 박타는 대목, 「심청가」 후반부 등을 녹음하였다. 「흥부가」는 1991년 한 장짜리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성수는 한 번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차지하지 못하였는데, 1981년 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2등에 입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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