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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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砂金 |
영어의미역 | Placer Gold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노대진 |
[정의]
193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전라북도 김제 지역을 중심으로 채굴된 정제되지 않은 금.
[개설]
백제 때 벽골군(碧骨郡)이던 지명이 신라의 통일 이후 김제군으로 바뀐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말쯤부터 금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산사(金山寺)로 이름난 구악산(口岳山) 서쪽 지명이 금산(金山) 금구(金溝)인 것도 김제 지역에서 일찍이 금이 생산되었음을 말해준다.
[일제강점기]
1906년부터 1912년까지 7년간 김제 지역 내에서 매년 3~9건씩 모두 37건의 사금광이 허가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1930년대 이후 금광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일본은 한국 경제 수탈을 위해 전국의 지질 조사와 광산 조사를 폭넓게 실시하여 광산을 개발했으며, 특히 1930년대 이후로는 금광과 광산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당시 김제 지역의 금광도 모두 9군데로 일본인들은 채취한 광석을 트럭으로 전주에 옮겨 철도를 통하여 장항 제련소로 이동시켜 정제하였다. 1934년에는 36건의 사금광이 허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당시 국내 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다. 1952년 30여 개의 사금광에서 생산된 금은 10,500g으로 이것이 1940년대 생산량의 2%에 불과했다는 도 당국의 기록에 따를 경우 일제강점기 때의 생산 규모는 연간 500㎏을 상회했다는 계산도 나온다.
[1980년대]
1958년 이후 완전히 자리를 감췄던 김제 지역 사금광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980년 중동 건설 현장에서 대량으로 반입된 포크레인과 불도저 등 중장비가 투입되면서 부터였다. 유휴 장비에 눈을 돌인 사금업자들이 장비를 임대하여 채금에 나서면서 김제 지역에서 새로운 골드러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채금이 절정을 이룬 1983년의 경우 옛 사금 생산지인 김제시 황산면과 금산면 일대 평야부에 1백여 개소의 금광이 개설된 것을 비롯하여 1987년까지 매년 70여 개 소의 금광이 개장되어 300대 안팎의 중장비가 동원되었다. 이때의 사금 채취장의 규모는 1,653㎡에서 3,306㎡까지 다양했으며, 사금 채취업자들은 논밭을 3.3058㎡당 3천~4천 원씩을 지주에게 지불하고 임대해 사금을 생산하였다.
1980년대 포크레인과 불도저 등 중장비가 동원되면서 15m까지 굴착해 사금광 옆에는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흙산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사금 채취 과정은 겉흙을 파내고 금을 함유하고 있는 모래층이 나오면 이를 긁어 올려 선별기에 넣은 후 물에 걸러 제련하지 않은 피금을 골라내는 비교적 단순한 작업이다.
김제 지역에서 생산된 사금의 순도는 85~93%로 사금 채취로 많은 수입을 올린 업자도 여러 명 있는 반면, 금맥을 찾지 못하거나 채굴량이 적어 경비도 거두지 못한 채 철수한 업자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제시 황산면 황남리 신흥마을 등 몇몇 마을 주민들도 채금업자에게서 받는 토지 임차료와 채광 작업장에 나가 번 돈으로 부촌(富村)을 이루기도 하였다. 반면 금을 발견하지 못해 사업에 실패한 업자들이 주민들의 토지를 파헤쳐 놓은 채 자취를 감추는 등의 사례도 매년 2~3건씩 발생하여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1987년 71건에 231,406㎡ 규모이던 사금 채취장이 1988년에는 35건에 99,174㎡으로, 1989년에는 6건에 23,140.6㎡ 규모로 급격한 쇠퇴를 보이다 1990년대 초 금 수입 자유화로 인한 가격 하락과 채광량의 감소로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사금 채굴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