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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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社會運動 |
영어의미역 | Social Movement |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노대진 |
[정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 사회의 변혁과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집단적으로 전개되는 일체의 행동.
[개설]
사회운동은 기존 사회의 사회 규범 또는 가치 체계 등의 변혁이나, 어떤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행동하는 조직적·집단적 활동이다. 사회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인 대중 운동으로서 흔히 시위운동, 서명 운동, 연좌 농성 등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하며 사회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주민운동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전라북도 김제 지역에서도 이미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학농민운동, 의병운동, 3·1운동, 항일학생운동 등의 사회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특히 1987년의 노동자 투쟁을 기점으로 각종 시민 단체의 결성과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3·1운동]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한 후 헌병·경찰 등의 무력을 바탕으로 이른바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막대한 예산으로 장기간에 걸친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하여 총독부는 물론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일본인 지주들이 대규모로 토지 집적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한국 농민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회사령 등을 통하여 민족 자본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의 진출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한국 내 식민지 경제 구조를 구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저항은 일제의 힘에 눌려 산발적인 형태로만 표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대 말의 국제 정세 변화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연금 상태에 놓여 있다가 사망한 고종의 독살설이 일제에 대항하는 전 민족적 의지를 표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18년 1월 미국 윌슨 대통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주장하자 국내는 물론 상해, 동경, 미국 등지의 한인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어떤 형태로든 한민족의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대표를 파견함과 동시에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고, 이는 일본의 한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가장 먼저 폭발하였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동경의 조선 YMCA회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 후 국내에서도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의 연합으로 준비가 진행되었다. 마침내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시내 각 학교의 학생들과 국장 때문에 지방에서 올라온 대규모 군중들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 선언서의 낭독과 함께 시가행진을 펼치는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3·1운동은 전국 각처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전라북도 지역의 3·1운동은 독립 선언서가 천도교 조직을 통하여 익산, 김제, 옥구, 무주, 정읍, 태인, 순창, 부안, 고창 등지로 배포되면서 3월 3일부터 시작되었다. 김제에서도 3월 2일 김제읍 천도교 교구실에 독립 선언서가 도착되었으며, 교구장 공문학(孔文學)이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교인 김봉빈(金鳳彬), 안백균(安白均) 등을 통하여 죽산, 부량 등 각 면과 인근 고을에 배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3월 4일에는 김제역 대합실에서 20장으로 된 독립 선언서 한 꾸러미가 발견되었고, 3월 6일에는 김제읍에서 선언서가 살포되는 등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도내 여러 곳에서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자 김제에서도 3월 20일 장날을 기하여 오후에 김제시 금산면 원평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원평장터에서 구월리 청년 배세동, 전도명, 전도근, 전부명, 이병섭, 김성수 등이 태극기를 나눠주며 독립 만세를 부르자 수백 명의 군중이 일제히 합류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들과 헌병들의 무력 제지로 인해 군중은 해산되고 주동자 배세동 등 10여 명이 검거당하여 6개월 내지 1년의 강제 형을 당하였다.
이후 4월 4일 정오 무렵에는 김제 만경의 만경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 임창무·오연길·장택선·이석재 등이 학생들과 함께 펼친 만세 시위가 있었다. 훈도 임창무가 3학년·4학년 생도 전부를 교정에 모아놓고 독립 정신의 고취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자 생도 1백여 명이 모두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이에 시장에 모인 수백 명이 합류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순찰 중이던 순사와 승강이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출동한 김제경찰서 무장대의 무력 제지로 대열은 해산되었고 임창무를 포함한 몇몇 주동 인물은 검거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항일학생운동]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한 뒤 민족 독립 운동은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3·1운동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보다는 민족의 실력 배양을 위한 교육 문화 운동과 언론 운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와 더불어 신문화 및 신사상의 계몽자로서 학생층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1920년 5월 ‘조선학생대회(朝鮮學生大會)’의 조직을 필두로 유사한 성격의 학생 단체나 학생 비밀 결사 운동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전라북도 김제 지역 출신 학생들 중 다수도 중앙의 항일 학생 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김제 지역 내에서도 만경공립보통학교의 동맹휴학, 이리농림학교 화랑회 사건, 전주농협학교의 맹휴사건, 김제치문학교의 학생 운동 등 여러 항일 학생 운동이 이어졌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을 맞아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군중들이 경성에 운집하였다. 당시 김제군 만경면 만경리 출신으로 중앙보고 특과 2년생이던 곽대형은 같은 학교 학생들과 함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 및 중동학교 학생들과 합세하여 국장일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6월 10일이 되자 수은동 단성사 앞 길가에서 국장 행렬을 봉숭한 뒤 각기 소지하고 있던 격문을 살포하였다.
김제시 죽산면 서포리 출신의 박종운(朴鍾雲)은 박일봉, 한종수, 조성효 등과 함께 당시 보성고보 교장, 교무주임, 교사 등의 인격 및 교수 방법에 대한 불만으로 1927년 7월 7일 진정서를 작성하여 교장에게 제출하고 회답을 요구하였으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자 교장을 끌어내어 교문 밖으로 매어 내놓은 뒤 교문을 패쇄 하는 등 친일 교사의 배척 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만경공립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은 만경공립보통학교 5학년생 40여 명이 1927년 11월 12일부터 등교하지 않고 일제히 동맹 휴학을 단행한 사건이다. 이유는 당시 5학년 담임 교원인 일본인이 성질이 패악하여 매사에 학생들을 구타하자 이에 항거함과 동시에 조선의 역사 교육을 요구하면서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이리농림학교 화랑회 사건은 1943년 이리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상운(李相云)이 중심이 되어 항일 비밀 단체로 결성된 화랑회 회원들이 비밀 지하 공작 투쟁을 계획하고 같은 해 5월 17일 밤 김제시 금구면 오봉리의 고갈봉 광산을 습격하여 총기 등의 무기를 탈취하려고 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제의 경계 강화로 실패로 돌아갔고 이상운을 비롯하여 전 조직원이 체포되어 김제경찰서에서 구금되었다. 이후 혹독한 고문으로 이상운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기타 동지들은 심한 부상으로 병원에 요양되었으며 전 간부 10여 명이 퇴학당하고 화랑회 조직은 해산되었다.
김제치문학교 학생 운동은 치문학교 학생들이 1943년 만경강 제방 상의 호남선 철도 횡단로 남쪽에서 유강리에 이르는 구간의 철로주정용정(鐵路周定用釘)을 50여 개 발정한 사건이다. 그러나 선로 보수공들에 의해 발견된데 이어 이 사건이 김제경찰서 고등계에 이첩되어 조사가 시작됨으로써 1943년 4월 말 김제치문학교 학생 30여 명이 연행되었다.
[주요 사회운동 단체]
2009년 현재 전라북도 김제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주요 사회운동 단체로는 환경보호국민운동본부 김제시지부, 종교인협의회, 김제농민회, 여성농민회, 진보정책연구회, 나눔의 집, 김제생협준비위원회, 김제자치연대, 김제여성상담소, 한농연 김제시연합회, 전교조 김제지회, 동화읽는 어머니회, 김제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김제시 한의사회, 김제시 약사회, 상인연합회, 녹색연대21, 친환경농업생산자연합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대표적인 단체가 환경보호국민운동본부 김제시지부이며 시민 의식 개혁으로 후손에게 깨끗한 물, 맑은 공기, 푸른 강산을 물려주기 위한 환경 보호 및 감시 기능을 겸한 순수 봉사 단체로 결성되어 김제시의 각종 환경 보호 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세부적인 활동을 보면 우선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운동, 만경강 샛강 살리기 운동 등 생활환경의 개선과 자연환경의 보전을 위한 다각적인 환경 보호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으며 분야별 전문 교수를 초빙하여 회원의 환경 보호 관련 자질 향상을 위한 정기적인 소양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환경 단체 및 각종 관련 연구 기관 등과의 학술회의나 연구 토론 등의 상호 교류를 통해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환경 친화적 정책 개발에도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