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6008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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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戴炯 |
영어음역 | Gwak Daeh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채수환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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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
성별 | 남 |
본관 | 현풍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곽대형(郭戴炯)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읍 만경리 출신으로, 1926년 중동학교에 재학 중 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 등과 중동학교 대표로 6·10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활동사항]
6·10만세운동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전문 학생층의 계획과 중앙고등학교와 중동학교 중심의 중등 학생층의 계획으로 추진되었다. 전문 학생층의 시위 계획은, 1926년 4월 26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 80여 명이 춘계 야유회를 위해 세검정(洗劍亭)으로 가던 중 순종이 승하했다는 비보를 들으면서부터이다.
이들 중 40여 명이 5월 20일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朴河鈞)의 하숙집에 모여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 준비 책임자로 이병립(李炳立)[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 이선호(李先鎬)[중앙고등보통학교 4년], 이천진(李天鎭)[경성제국대학 예과 1년], 박두종(朴斗鍾)[YMCA 영어과]을 선출하고 자금은 박하균·박두종이 맡게 되었다.
중등 학생층의 시위 계획은, 중앙고등학교의 박용규(朴龍圭)·이동환(李東煥)[중앙고등보통학교 5년], 중동학교 특과 2년에 재학 중이던 곽대형과 김재문[중동학교 특과 3년]·황정환[중동학교 특과 3년] 등이 순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 고등학교 학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5월 29일 김재문의 하숙집에서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단기 4259년 6월 10일, 조선 민족 대표 김성수(金性洙), 최남선(崔南善), 최린(崔麟)”이라는 격문을 기초하여 5,000매를 등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지고 이를 다시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6월 10일을 기다리게 했다.
순종의 인산날에 참가한 학생들은 24,000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시민들과 함께 도열하고 있었고, 일제는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인 8시 30분경 중앙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이 “조선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고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이날 관수교 부근과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앞, 훈련원 부근, 동대문 근처, 신설동 부근, 동묘 부근 등 7개 장소에서 학생들의 만세 시위와 격문 살포가 있었다.
이처럼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벌어지자 일본 경찰과 군대는 현장에서 210여 명을 체포하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을 구속하였다. 이중에서 53명을 수감하였다가 주모자급 11명만을 기소하고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 명단을 보면 이선호, 이병립, 박두종, 박하균, 이천진, 유면희[중앙고등보통학교 4년], 박용규[중앙고등보통학교 5년], 이동환, 곽대형, 김재문, 황정환 등이었다.
이후 6월 10일의 학생 시위가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서울 시내 6개 고등학교 대표 수십 명이 서대문 피어선 성경학원에 모여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6월 16일 피어선 학원생 유재헌과 배재고등학교 학생 김동진, YMCA 학생 김동석 등이 체포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광주 등지에서 동맹 휴학이 일어났는데, 이는 다시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하여 독자적으로 계획되고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 온 학생들의 결사, 동맹 휴학, 계몽 활동 등의 학생 운동이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6·10만세운동은 침체된 민족 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 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교량적 역할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항일 민족 독립운동의 큰 횃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