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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600466
한자 朝鮮時代
영어의미역 Joseon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백덕규

[정의]

1392년부터 일제강점기 전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김제의 역사.

[조선 전기]

조선시대 지방 통치제도는 이미 태종 대[1400~1418년]에 대개 확립되었고, 세조 대[1455~1468]에 일부가 개정되었으며, 이것이 그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실리게 되었다. 김제 지역에는 조선시대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는데 우선 1403년(태종 3)에 김제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1415년(태종 15)에는 벽골제가 크게 중수되었으나 이득은 적고 폐해만 많다고 하여 곧 폐기됨으로써, 호수는 마르고 그 자리는 황무지가 되었다. 김제군만경현금구현은 모두 조선시대 초의 계수관제에서 전주 계수관의 관내였고, 1466년(세조 12) 이후의 진관제(鎭管制)에서도 전주진관에 속하였다.

[조선 후기]

1628년(인조 6)에는 만경현이 폐지되었고 그 경역이 모두 김제군에 병합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이곳도 예외 없이 막심한 전화(戰禍)로 피폐하였다. 뒤이어 흉년과 기근이 계속됨으로써 주민 대부분이 떠나 흩어졌고, 자연히 현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김제에 속했던 만경은 2년 후에 전주부로 이속되었다. 그러다가 1637년(인조 15)에 사정이 호전되어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

1801년(순조 1)에는 만경현의 고군산도가 분계되어 독립 행정구역이 되었다. 고군산도는 본래 이름이 군산도이며, 고려시대 말에 대중 항로의 주요 기항지로서 번영하였다. 또한 이곳에는 군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말에 대중 무역이 위축되면서 무역로가 바뀌었고, 군산진이 왜구를 피해 옥구현 진포[지금의 군산시]로 옮겼으며, 조선 왕조가 쇄국정책을 펴게 됨으로써 쇠퇴하게 되었다. 다만 조선시대에도 이곳의 성어기(盛魚期)의 파시(波市)에는 상선이 운집하였고, 주민들의 생활은 윤택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진이 다시 설치되면서 이곳의 이름은 고군산도로 바뀌었다. 이후 고군산진이 1801년 독진(獨鎭)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만경현으로부터 분계되었다.

고군산도는 1895년(고종 32)에 나주부 지도군(智島郡)에 속했다가 1914년 전라북도 옥구군 광면(光面)의 일부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94년에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었는데 이 혁명의 중심지가 금구였다. 즉, 전주성을 점령했다가 철수한 후에 전봉준을 비롯한 혁명군의 수뇌부는 금구 원평[금산면 원평리]을 주된 근거지로 삼았다. 원평은 몇 개월 동안 혁명군의 수도였으며, 다시 봉기하여 북진했던 혁명군이 일본군에게 패퇴하면서 최후의 결전을 치른 곳이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에 있었던 이 원평전투를 마지막으로 동학군은 무너졌다.

한편, 임진왜란 후에도 김제군만경현금구현의 3군현은 모두 전라도 중관[전주]에 속하였다. 만경현금구현은 1895년에 군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양군(兩郡)은 김제군과 함께 전주부[관찰사]에 속하였으며, 이듬해에는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3군은 함께 전라북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에는 만경군금구군이 마침내 김제군에 병합됨으로써 오늘날의 김제시 영역이 형성되었다.

[관련 유물 및 유적]

김제지역에 있어 조선시대 문화유적은 무수히 많으나 그중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보면 금산사의 미륵전, 금산사 대장전, 김제향교 대성전, 그리고 김군 동헌과 내아 등을 들 수 있다. 금산사 미륵전은 김제에서 유일한 국보(제 62호)로서 아주 독특한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이다. 외관상으로는 팔작지붕의 3층 건물이지만 내부는 각 층간의 구별없이 통층(痛層)으로 되어 있다. 금산사 미륵전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766년(혜공왕 2)에 진표율사가 건립된 것이 었으나 1635년(인조 13)에 수문대사가 정유재란 때에 병화로 소실된 것을 재건한 것이다. 1748년(영조24)에는 금파대사 그리고 1938년에는 성열대사가 각각 이를 중수하였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그리고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와 같은 명칭들은 모두 미륵전과 관련이 있는 것인바 통일신라시대부터 미륵보존을 이 절에 봉안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현재 미륵전 안에는 미륵 3존 입상이 안치되어있다.

금산사 대장전은 보물 제 827호로 대적광전 왼편에 자리잡고서 멀리 동쪽으로 미륵전과 마주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용마루 한가운데 탑의 상륜부가 얹혀있다는 점이다. 대장전이 그러한 모습을 띠게 된 내력에 대하여 『금산사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오른쪽 앞에 위치하였던 목조탑으로서 미륵전을 장엄하게 꾸며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1635년(인조 13) 다시 세울 때에는 철개(鐵蓋)와 염형보주석(焰形寶珠石)만을 지금처럼 지붕 위에 남겨 놓고 아예 그 구조까지도 보통 당우로 바꾸게 되었다 한다. 대장전 안에는 소조도금한 석가모니불 좌상과 그 좌우에 소조도분한 석가의 두 제자 가엽과 아난이 봉안되어 있다.

사적 482호로 지정된 김제군 관아와 향교에는 3점의 유형문화재가 있는데 김제향교 대성전이 유형문화재 제 9호로1404년(태종 4)에 창건되었으나 정유재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인조 13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 60호로 지정된 김제동헌은 한식 목조와가로 동남향으로 앞면 7칸, 옆면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김제동헌의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지만 1978년에 발간된 한 고문서에 의하면 동헌 건물이 현종때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1667년(현종 8)에 군수 민도(閔燾)가 동헌을 세우고 이를 근민헌(近民軒)이라 칭하였으며, 그 후 1699년(숙종 25)에 이세성이 이 동헌을 중수함과 아울러 그 명칭을 사칠헌(事七軒)으로 개명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동헌 건물은 일제시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으며, 근래에 이르러 몇 차례의 보수와 복원작업이 행하여졌다.

유형문화재 제 61호로 지정된 김제내아는 구전에 의하면 김제 동헌의 건축 연대인 1667년(현종 8)에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ㄷ’ 자형 안채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안 행랑채, 고방채, 안 변소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이다. 내아는 동헌의 바로 뒤편에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동쪽이 트인 ‘ㄷ’자형의 팔작지붕집으로 내 동헌으로서의 소박하면서도 장중하고 균형잡힌 옛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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