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E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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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마수리 |
집필자 | 이상기 |
일반적으로 박씨의 시작은 신라를 세운 혁거세로부터 본다. 혁거세의 후손인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917~923]은 여덟 왕자를 두었고, 이들이 다스리는 주군(州郡)에 따라 박씨의 관향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운봉(雲峰)박씨도 이들의 후손일 것으로 여겨지나 문헌이나 족보를 통해 계보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1988년에 발행된 『운봉박씨 족보』에 따르면 계보가 경명왕의 큰 아들인 밀성대군 언침(彦忱)에게로 이어진다. 박혁거세왕을 1세로 했을 때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이 30세이다. 이후 계보는 40세인 운봉군(雲峰君) 중화(仲華)에게까지 이어진다. 운봉박씨는 바로 고려 말에 살았던 운봉군 중화를 중시조로 하여 새로운 본을 형성한 것이다.
운봉박씨는 운봉군 중화를 다시 1세로 하여 현재 26/27세까지 이어지고 있다. 『운봉박씨 족보』에 따르면 운봉군 중화는 고려시대 문신으로 벼슬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렀고 운봉군에 봉해졌다. 그가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묘가 통진현(通津縣) 동쪽 10리 상포(霜浦)[현재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있다.
이후 운봉박씨는 계방(桂芳)[벼슬 도첨의찬성사, 시호 忠貞]과 지의(之誼)[벼슬 판한성부사,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를 거쳐 신(信)으로 이어진다. 신은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시대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사에 이른 분으로 운봉박씨 중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신은 고려 공민왕 11년(壬寅:1362)에 태어나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성리학을 공부했다. 우왕 11년(乙丑:138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이후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로운 나라의 건국에 참여했다.
이후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를 역임하였으며,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저헌(樗軒) 또는 설봉(雪峰)이다. 시호는 혜숙(惠肅)이었으며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큰 아들이 종지(從智)이고 둘째 아들이 종우(從愚)이며 셋째 이들이 종귀(從貴)이다.
큰 아들인 종지는 장연부사를 지냈으며 이후 계속 통진에 살아 그 후손들을 통진파라 부른다. 둘째 아들인 종우는 태종(太宗)의 딸인 정혜옹주(貞惠翁主)와 결혼하여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졌고 그 후손들이 충주에 많이 살아 충주파 또는 운성군파라 불려진다. 셋째인 종귀는 일찍 죽었거나 후손이 없어 생몰연대 등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고, 딸은 의령남씨인 남간(南簡)에게 시집갔다.
마수리에 사는 운봉박씨는 바로 운성군 종우의 후손들로 16세인 운중(雲仲)에 이르러 마수리 온수골로 들어오게 되었다. 마수리의 입향조인 박운중[?~1738]은 원래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草川里)에 살다가 좀 더 넓은 들을 찾아다니던 중 가섭산 아래 온수골이 북쪽으로 들이 넓어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후 형제인 운경과 운흥, 사촌 형제들인 운상과 운제를 불러 들여 마수리가 운봉박씨 씨족 마을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씨족사회가 약해지고 있지만 현재도 마수리에는 운봉박씨들이 가장 많다.
운봉박씨들이 처음 터를 잡은 온수골은 1982년 율곡사업 지구로 지정되어 군부대가 들어오면서 수용되었다. 당시 이곳에 살던 사람들 중 일부는 마제와 신석으로 내려왔고 상당수는 신니면 소재지에 가까운 용원리 내용으로 내려갔다. 그러므로 현재는 운봉박씨를 신니면 마수리와 용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마수리에는 113가구 276명(마제 58가구 140명, 신석 55가구 136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 16가구가 운봉박씨이다. 이를 행정리 별로 구분하면 마제에는 10가구, 신석에는 6가구가 살고 있다. 이는 전체 가구의 14.2%이다. 그러므로 마수리가 갖는 씨족사회로서의 위상은 현저히 떨어졌다. 마수리 산 31-3번지에는 운봉박씨 충주파 시조인 운성부원군 종우를 기리는 사당인 성렬사(成烈祠)가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