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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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리의 네 마을은 농경지가 적당하게 있어 밭을 갈아먹던 산골마을은 아니었지만 부촌도 아니었다. 지주라고 해봤자 백석지기인 방씨네가 있었을 뿐, 대부분 그럭저럭 좁은 땅에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았다. 매년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닥쳤고 그때마다 마을 동계나 동네 지주로부터 장례쌀을 빌려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당시 마을재산은 정월에 풍장을 치며 집집마다 걸립을 하고 쌀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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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리는 시묘천을 따라 이어지는 지방도 602호선의 양쪽에 골짜기마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물길 방향인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보면 시묘2리, 시묘1리, 시묘3리, 시묘4리의 순서로 이어진다.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구자곡면 시절에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가 구자곡면이 1936년 연무읍으로 승격되면서 시묘리는 은진면으로 편입되었고, 이때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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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골의 노인회장 최재현 씨는 시묘리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할 만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31년에 출생하여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6·25 한국전쟁을 겪었다. 논산농고 제1회 졸업생이며 국가재건에 힘쓰던 시기에 논산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상경하여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에너지 파동으로 사업체는 부도가 나고 결국 고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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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4개리는 하천과 골짜기로 구분된 채 지방도 602호선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시묘1리는 가야곡면 야촌리와 경계를 이루는 관청산(觀淸山)에 기대어 있고, 마을 앞의 시도(市道) 4호 도로 건너편 배매산 아래에 시묘2리가 있다. 여기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 은진면 방향으로 1.3㎞를 가면 도로의 우측인 북쪽이 부수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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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타버린 창고는 마음에서 지우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곳곳을 헤매었다. 그때 시묘리를 찾게 되었는데 넓은 평지에 적당히 솟은 산줄기와 나지막한 언덕, 효자가 살았다는 ‘시묘’라는 동네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고속도로와 가까운 것도 좋아 시묘1리 골짜기 안쪽에 공장을 짓고 새 출발을 했다. 1997년 말 준공 신고를 하기 위해 시청에 갔을 때 텔레비전에서는 IMF 구제금융 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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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에 속하는 법정리. 옛날 지씨(池氏) 집안의 한 효자가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 하여 시묘골이라 하였다. 은진군 죽본면(竹本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에 부수리(富壽里)·용계리(龍溪里) 각 일부와 가야곡면 두월리(斗月里) 일부, 대조곡면(大鳥谷面) 용와리(龍臥里)·백양리(栢楊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시묘리라 하고 논산군 구자곡면(九子谷面)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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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현 씨가 사업에 실패하고서 돌아온 고향에서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였지만, 그때까지 직접 땅을 파 본 적이 없을 만큼 큰 고생을 모르고 살았던지라 바로 논밭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마침 들려오는 소문은 채운면 용화리에서 시작된 딸기농사가 수익이 좋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당장 채운면의 딸기밭을 찾아가 농사법을 살펴본 후 딸기 묘를 받아와 시묘골에 재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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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생스러웠다. 일제의 수탈은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장 풍요로워야 할 가을 추수 때에는 일부러 달빛도 없는 한 밤을 틈타 쌀을 짊어지고 옮겼는데 혹시 낮에 들고 다니다가는 뺏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적으로 토지측량을 벌였고, 지적도에 소유자 명을 쓰라 하였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