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리의 네 마을은 농경지가 적당하게 있어 밭을 갈아먹던 산골마을은 아니었지만 부촌도 아니었다. 지주라고 해봤자 백석지기인 방씨네가 있었을 뿐, 대부분 그럭저럭 좁은 땅에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았다. 매년 어김없이 보릿고개가 닥쳤고 그때마다 마을 동계나 동네 지주로부터 장례쌀을 빌려 겨우 연명해야만 했다. 당시 마을재산은 정월에 풍장을 치며 집집마다 걸립을 하고 쌀이나...
시묘리는 시묘천을 따라 이어지는 지방도 602호선의 양쪽에 골짜기마다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물길 방향인 남동쪽에서 북서쪽 방향으로 보면 시묘2리, 시묘1리, 시묘3리, 시묘4리의 순서로 이어진다.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구자곡면 시절에는 하나의 마을이었다가 구자곡면이 1936년 연무읍으로 승격되면서 시묘리는 은진면으로 편입되었고, 이때 인...
시묘4리 이장 나재완 씨는 일흔 넘은 나이이지만 풍채가 좋고 얼굴빛이며 목소리에서 강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인물이다. 그가 서슴없이 풀어내는 거친 농담 앞에서 낯선 이들이라면 얼굴을 붉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넘긴다. 시묘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4리 이장 나재완’을 알고 있을 만큼 동네에서 오랜 세월 많은 일을 해왔다. 네...
시묘4리의 버들골 골짜기 안쪽의 좁고 깊숙한 곳은 일명 ‘일천다랭이골’이다. 다랭이 논이 어찌나 길게 이어지는지 천 개나 된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하늘에서 비 내리기만 기다리는 천수답이었으므로 깊고 경사진 골짜기에 수십 개의 층계를 만들어 벼를 심고 흘러내리는 물을 활용하여 농사를 지었다. 오죽하면 ‘천개’라고 했을까. 그 이름만으로도 험한 산골을 일구며 살았던 옛...
시묘리는 4개의 행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4개리는 하천과 골짜기로 구분된 채 지방도 602호선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진다. 시묘1리는 가야곡면 야촌리와 경계를 이루는 관청산(觀淸山)에 기대어 있고, 마을 앞의 시도(市道) 4호 도로 건너편 배매산 아래에 시묘2리가 있다. 여기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 은진면 방향으로 1.3㎞를 가면 도로의 우측인 북쪽이 부수골...
불 타버린 창고는 마음에서 지우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곳곳을 헤매었다. 그때 시묘리를 찾게 되었는데 넓은 평지에 적당히 솟은 산줄기와 나지막한 언덕, 효자가 살았다는 ‘시묘’라는 동네이름이 마음에 들었고 고속도로와 가까운 것도 좋아 시묘1리 골짜기 안쪽에 공장을 짓고 새 출발을 했다. 1997년 말 준공 신고를 하기 위해 시청에 갔을 때 텔레비전에서는 IMF 구제금융 받게...
일제강점기는 그 어느 때보다 고생스러웠다. 일제의 수탈은 사람들의 삶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장 풍요로워야 할 가을 추수 때에는 일부러 달빛도 없는 한 밤을 틈타 쌀을 짊어지고 옮겼는데 혹시 낮에 들고 다니다가는 뺏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강제적으로 토지측량을 벌였고, 지적도에 소유자 명을 쓰라 하였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