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31320 |
---|---|
한자 | 嘉善大夫行同敦寧張公紀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 1307-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유화 |
건립 시기/일시 | 1935년 1월 하순 - 가선대부 행동돈녕 장공 기적비 건립 |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858년 2월 9일 - 장태지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918년 4월 11일 - 장태지 사망 |
현 소재지 | 가선대부 행동돈녕 장공 기적비 -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 1307-2 |
성격 | 기적비 |
관련 인물 | 장태지|민병한|정인욱 |
재질 | 화강암|오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90㎝[총 높이]|170㎝[비석 높이]|65㎝[너비]|25㎝[두께]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가선대부 장태지 기적비.
[건립 경위]
장태지(張泰址)의 둘째 아들 장기순(張基恂)이 아버지의 행적을 후대에 남기고자 가선대부행동돈녕장공기적비(嘉善大夫行同敦寧張公紀蹟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가선대부 행동돈녕 장공 기적비는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옥적리 1307-2번지에 있다.
[형태]
기단석에 비신을 세우고 비갓을 올린 전형적인 비석의 형태이다. 총 높이는 290㎝이고, 비석 높이는 170㎝, 너비는 65㎝, 두께는 25㎝이다.
[금석문]
비신 중앙에는 ‘가선대부 행동돈녕 장공 기적비(嘉善大夫行同敦寧張公紀蹟碑)’, 우측면 우측 상단에는 “세 을해 소춘 하한 자헌대부 의정부 찬정원임 규장각 직학사 여흥 민병한 짓고, 통정대부 비서원승원임 규장각 동래 정인욱 쓰다[歲乙亥小春下澣 資憲大夫 議政府 贊政原任 奎章閣 直學士 驪興 閔丙漢 撰 通政大夫 秘書院承原任 奎章閣 東萊 鄭寅昱 書]”, 우측면 왼쪽 상단에는 “소화 17년 임오 4월 일(昭和十七年 壬午四月 日)”이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말세에 사람은 가히 높은 절개에 힘쓰고 시대에 따른 변화 풍조에 옮기려 하지 않는 자를 나는 장 공에서 본다. 공의 이름은 태지요 본관은 인동이니 고려 시대에 충정공 안세의 후손이다. 이후 후손들이 모두 높은 벼슬을 지내 세상 사람들이 비록 족보를 만들지 않아도 그 계보를 알 수 있다. 증조의 이름은 문조이니 복정을 증하고 조부의 이름은 사현이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을 증하고 부친의 이름은 지표이니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증하니 공이 귀하므로 3세에 추증하였다. 철종 무오년 2월 9일에 태어나니 어려서 지덕이 뛰어나더니 장년이 되어 더욱 체격이 장대하고 천성이 인후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고 가르치고 감독함에 번거롭지 않고 문리가 날로 나아져 아우 국사 태린과 우애가 더욱 돈독하고 사문에 출입하여 경전을 널리 배우고 일찍이 서울에 유람하여 당세에 이름을 알리더라. 고종 정해년에 처음 벼슬을 얻음으로 충훈부도사가 되고 경인년에 감찰을 따라 사용에 이르고 동년에 도정을 행하고 동지돈녕부사에 오르니 벼슬한 지 수년에 한마음으로 삼가여 신하와 자식의 직분을 다하더니 나라가 탕진하는 날에 용감히 벼슬에 물러나 그 아우와 더불어 옥산에 은거하여 구학(舊學)을 찾아 밝은 도리를 익히고 주자의 고사를 도방하여 외우며 백록동강규와 남전의 여씨향약에 이르니 고을의 풍속이 크게 변하고 유학의 학풍이 크게 떨치니라. 갑오년 동학군의 무리가 무법으로 침략하여 모든 병폐가 다 일어나니라. 공이 수사 김철규에게 부탁하여 급히 방문을 베껴 일일이 금지하니 기거하는 백성들이 안도하더라. 그 고을에 살면서 삼물 팔형으로 권고와 징분을 분명히 하더라. 애통하게 그 아우가 일찍 죽어 그 조카 효기를 기르기를 자기 자식과 같이 넉넉히 하니 효기 또한 엄한 가훈을 이어 학문에 전심하니 고을에서 거듭 추천하니라. 경술 옥사 때 분함에 화병으로 신음한 지 8~9년에 끝내 무오년 4월 11일에 돌아가시니 안량산 서록부 임좌에 장사 지내다. 배는 정부인 밀양박씨니 묘는 쌍조라. 5남 1녀를 낳으니 장자 기환은 초시에 합격하고 차자 기순은 정훈에 물들어 몸소 시례로 단속하고 다음으로 용규, 율, 용기도 아울러 효제 문학으로 칭찬하더라. 딸은 상주 박기석에게 시집가다. 기환이 2남 동호 민호를 낳고, 기순이 1남 근호를 낳고, 용규가 2남 은호 이호를 낳고, 을이 1남 세방을 낳고 용기가 2남 우호 세붕을 낳으니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하니라. 공의 아름다운 행적이 많은 사람의 입이 비보다 넉넉하리라. 족히 가히 천추에 썩지 않거늘 어찌 비를 기다려 새기리오? 공의 아들 기순이 선조의 도리에 정성이 깊어 기념비를 세울 것을 모의하여 나에게 그 대개를 지어 줄 것을 요구하거늘 그 양친을 위함에 감동하여 굳게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다음과 같이 서하고 이어서 명하나니 명에 이르기를, 충정의 빛나는 후손으로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도다. 공이 날 때부터 지덕이 뛰어나 일찍이 나라의 근심은 생각하였다. 기회를 보아 용감히 물러나니 야인으로 사적이 흐리니라. 돌아보니 공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선비가 많았다. 명분과 절의를 연마함이요 효우 화목이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길을 가고 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에도 때가 있으니 어찌 이르고 늦음을 논할 것인가? 휘황찬란한 곧은 비석이 족히 억만년을 경험하리라[叔世之人可以勵氣尚節而不為風潮所移者余於張公見之矣公諱泰址字性默號蘭齋貫仁同麗朝忠貞公諱安世為中系顯其後簪組蟬奕世稱不世譜而譜者也會祖諱文祚 贈僕正祖諱士賢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志杓 贈嘉善大夫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以公貴三世追榮者也 哲廟戊午二月九日生幼而岐凝嶷壯益魁偉天性仁厚喜怒不形于色不煩教督而文理日就與弟菊史泰璘友愛甚篤出入師門博學經傳早遊京洛知名當世 高宗丁亥以筮仕入為忠勳府都事庚寅由監察進至司勇同年行都正陞同知敦寧府事立朝數年一心謹烙極盡臣子之職及國家板蕩之日解紱勇退與其弟隱於玉山溫尋舊學講明道理倣朱夫子古□ 誦白鹿洞講規及藍田呂氏鄉約鄉俗不變儒風大振甲午東擾 匪從横侵百弊俱興公囑於水使金澈圭嚴寫榜文一一禁止居民安堵其在鄉黨以三物入刑勸懲分明痛惜其弟之早逝撫育其姪孝基優於己子孝基亦承嚴訓專心學問鄉黨推重及庚戌屋社憤成心火呻吟八九年竟卒于戊午四月十一日葬于安良山西麓負壬之原配卓夫人密陽朴氏墓雙兆生五男一女長基奐捷初試次基恂濡染庭訓律己詩禮次墉奎次律次龍基幷以孝悌文學見稱女適尚州朴猉錫 基奐生二男東鎬敏鎬基恂生一男瑾鎬墉奎生二男恩鎬二鎬律生一男世芳龍基生二男又鎬世鵬餘不盡錄噫公之美行懿蹟萬口豊碑足可為千秋不朽何待伐石而勒之公之子基恂甫誠深於為先之道謀堅紀念之石要敍 其概感其為親不可窂辭遂序此如右繼之以銘銘曰忠貞華裔深源弘流公生岐嶷早泡國憂見機勇退蹟渾埜人顧公門戶俊彥彬彬砥礪名節孝友睦婣闡拔有時何論早晚煌煌貞玉足徵億萬]”라고 쓰여 있다.
[현황]
2021년 6월 현재 가선대부 행동돈녕 장공 기적비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