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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101
한자 興國寺 寂默堂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조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03년 5월연표보기 - 흥국사 적묵당 중창
개축|증축 시기/일시 1895년 - 흥국사 적묵당 중수
현 소재지 흥국사 적묵당 -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지도보기
원소재지 흥국사 적묵당 -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길 160[중흥동 17]
성격 당우|불교 건축물
양식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의 익공계 주심포 양식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3칸
소유자 흥국사
관리자 흥국사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흥국사에 있는 당우.

[개설]

흥국사 적묵당은 보살 대중방과 선방을 겸하는 공간이다 .

[위치]

흥국사의 중심 공간으로 대웅전 오른쪽에 자리해 심검당과 마주 보고 있다.

[변천]

「영취산 흥국사 적묵당 중창상량문(靈鷲山 興國寺 寂默堂 重創上樑文)」에 “……가경팔연계해오월이십이일술시상량벽택문인효암 충일근지(嘉慶八年癸亥五月二十二日戌時上樑碧澤門人孝庵充鎰謹誌).”라는 기록으로 보아 흥국사 적묵당은 1803년(순조 3) 효암(孝庵)과 충감(充鑑)이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흥국사의 다른 전각들의 경우 이전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812년(순조 12) 작성된 「영취산 흥국사 심검당 중창상량문(靈鷲山 興國寺 尋劍堂 重創上樑文)」에 “임진왜란 당시 심검당만 남기고 모든 전각이 불탔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 이전의 건물은 모두 불타 없어졌고 언제 불사를 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1895년(고종 32) 경허 대사가 중수하였다.

[형태]

적묵당(寂默堂)의 적묵(寂默)은 말없이 명상한다는 뜻으로 ‘참선’의 의미이다. ‘심검’이란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의 풀을 벤다는 뜻에서 강학과 강설 및 탐진과 상통하므로 강당 또는 승당의 의미이다. 또한 설선당은 참선과 강설의 의미가 복합된 것이다. 회승(會僧), 진회(振會), 해회(海會), 감로(甘露) 등의 당우도 강설당 또는 승당의 의미이다.

흥국사 적묵당은 심검당과 같이 땅을 고르지 않고 기둥으로 높낮이를 잡았다. 연면적은 102.94㎡[31.14평]이다.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을 혼용한 형태의 건물로 제법 화려하게 지어졌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우측 첫 번째 칸은 바깥에서 토벽을 쳤다. 첫 번째 칸은 두 번째 칸과 한 방으로 만들어졌다. 방 안에서 통하는 부엌이 딸린 큰 방 형태로 뒤쪽에 마루가 있다. 공포는 외이출목의 익공계를 응용한 주심포계이다. 오른쪽 첫 번째 칸은 아래쪽에 판벽을 치고 가운데에 크게 붙박이를 만들었다. 두 번째 칸은 마루를 만들지 않고 죽담에서 바로 문지방을 넘어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디딤돌을 깎아 놓았다. 나머지 세 칸은 마루를 놓고 세살청판분합 문을 달았다. 가운데 두 칸은 디딤돌을 크게 깎아 놓았고 왼쪽 첫 번째 칸은 디딤돌을 놓지 않았다. 정면에서는 방만 보이나 방 안에서는 뒤쪽 부엌과 통하는 문이 있다.

건물은 통상 땅을 반듯하게 고르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우고 건물을 짓는데 흥국사의 적묵당과 심검당은 땅을 그대로 두고 땅의 높이에 기둥의 높이를 맞춰 건물을 올린 것이 특징이다.

[현황]

한국 불교는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西山大師)[휴정대사(休靜大師)]의 법맥으로 통합되면서 통불교가 된다. 교종과 선종 그리고 모든 종파를 하나로 융섭한 것이다. 이후 강원의 역할은 심검당이 하고 선원의 역할은 설선당이 하였다. 선원과 강원의 의미를 지닌 심검당과 설선당이 금당의 좌우 하단에 배치되어 선과 교를 겸수하도록 배치한 것이 임진왜란 이후 가람 배치의 특징이다. 좌측에 설선당을 배치하고 우측에 심검당을 배치할 수도 있다. 원칙은 없다. 교와 선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순천 선암사는 좌측에 심검당, 우측에 설선당을 배치하였다. 흥국사는 좌측에 심검당, 우측에 적묵당을 배치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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