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1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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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防倭築堤 |
이칭/별칭 | 수중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병호 |
성격 | 관방유적|제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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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수중제방 |
건립시기/연도 | 1497년 |
관련인물 | 이량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시 여수만 앞 장군도와 돌산도를 잇는 수중 석축.
[건립경위]
장군도는 여수시 중앙동 산1번지를 이루는 무인도로 섬의 주위가 600m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섬이다. 대나무가 많아 대섬[竹島]으로도 불린다고 알려졌으나 장군도에 대나무는 없다. 죽도는 대섬을 한자로 음차한 이름이다. 대나무가 많은 섬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대나무의 마디마디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육지에 가까이 잇대어 있어 대섬이라 한다. ‘배를 선창에 대다.’에서처럼 육지 가까이 잇대어 있는 섬이란 뜻이다. 오동도도 육지에 가까이 잇대어 있어 대섬이다.
여수팔경 중 죽도청풍(竹島淸風)은 대섬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이다. 여기서 대섬은 흔히 오동도로 알려졌으나 장군도를 일컫는 이름으로 봐야 한다. 전라좌수영 시기 여수팔경 소개와 함께 장군도 소개가 뒤따르는 글들이 많음이 뒷받침한다.
장군도를 통과하는 해로는 여수만에서 광양만을 잇는 지름길이다. 이 해로를 거치지 않으면 돌산도를 멀리 우회해야 하기 때문에 남해를 통하는 중요한 길목이다. 조선시대에 해적선이나 왜구의 배까지 장군도의 동쪽 수로를 자주 이용하여 전라좌수사 이량(李良)이 이를 막기 위해 물 아래에 둑(堤)을 쌓았다.
방왜축제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신증문헌비고』에 “성종 갑인년(1494)에 수사 이량이 쌓았다”고 하여 『호좌수영지』에 기록된 시기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산군실록』 1497년(연산군 3) 3월 2일에 “이량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한다.” 이후 같은 해 3월 4일부터 10월 15일까지는 전라좌수사로 기록되고 10월 25일에 전라우도절도사로 삼았다고 기록되었다. 이로 미루어보아 방왜축제가 건립된 시기는 1494년이 아니라 이량의 재임시기인 1497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치]
전라남도 여수시 중앙동 산1번지, 여수만 앞바다 장군도와 돌산도 사이 수중.
[형태]
방왜축제는 현재 대부분 파괴되어 정확한 현상을 알 수 없다. 배로 돌을 운반하여 물 속에 던져 넣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은 채 돌을 매립했음을 알 수 있다. 장군도 주변은 유속이 매우 빠른 지역이기 때문에 제를 쌓는 일은 더욱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간조 때를 제외하고는 제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다. 섬 가장자리로 갈수록 큰 석재들이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남아 있는 부분은 특별히 열을 이루지 않고 다양한 크기의 돌들이 무질서하게 채워 넣어진 상태다. 제의 형태는 일직선을 이루고 있지 않으며, 가장자리는 너비가 30m 이상으로 제법 넓으나 가운데는 약 10m 내외로 좁아 전체적으로 호형(弧形)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제가 훼손되면서 나타난 현상인지 축조할 당시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방왜축제비에는 축대가 수면 위로 상당한 높이까지 올라와 마치 성을 쌓은 것처럼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방왜축제는 단순히 적군의 배가 통행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내륙의 영성(營城)이 적군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병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