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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은 의지할 데 없는 병든 자들을 자신의 가족 이상으로 관심을 갖고 보살핀다. 애양원은 낯선 외국인들이 치료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까지도 배려하는 박애 정신의 산실로서 기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애양원과 관련된 마을들은 환자, 특히 일반인들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접촉을 꺼리던 나환자 등 소외 계층의 공동체로서 자연스레 발생되었다. 도성마을은 1975년 토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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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마을들은 생태적인 생동감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사람이 움직이면 쓰레기만 나뒹굴고 처음엔 근사하다가도 사람 손이 가면 예전만 못해지는 게 전국의 마을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따라서 애양원은 향후에도 이 모습 그대로 지속하여 자연스럽게 생태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의지할 데 없는 한센병 환자들이 이곳에 옮겨져 다시 꿈을 꾼다. 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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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법인 여수애양원 안에는 애양병원, 평안양로원, 장애자재활기술보도소 등 환자들의 편익을 위한 조직체들이 있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 및 일반 장애자들에게 의료적·직업적·정신적으로 재활을 도모하고 영적 구원에 이르기까지 전인 치유의 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요양 보호 및 진료와 한센병 환자의 발견 및 계몽, 직업 재활 등 현장 중시적인 생산적인 사회 복지 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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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孫良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1919년 서울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0년 부친이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였다. 1920년 일본 츠가모중학교[巢鴨中學校]에 다시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으며 1926년부터 1934년까지 부산 감만동 나환자 교회에서 조사(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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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 속에서 두 아들이 총살당한 계기를 제공한 안재선을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손양원 목사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안재선을 부산 고려성경고등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웠다. 안재선은 성경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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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사회주의 계열 군인 일부가 봉기하였다. 이들은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 시내 경찰서와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 기관을 장악하고 이어 순천까지도 점령하였다. 이 당시에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은 순천사범학교와 순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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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객지를 생활한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 온 사례가 많다. 남자들의 경우 일찍이 바다와 더불어 지내어 자연스럽게 수산고등학교를 다니고 외항선을 타면서 경제적으로 자립을 한 마을사람들도 꽤 있다. 결국은 바다의 넉넉함으로 인하여 고향의 품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바다가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포근함을 주고 있다는 느낌들은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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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이라는 한센병 집단 치료소는 병을 고치는 공간인 동시에 한센병 환우들의 삶과 눈물,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는 곳이다. 대다수의 한센병 환자들은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이 있고 더 나아가서 사회로부터 멸시당하는 고통이 있었다. 심적인 아픔은 육체적 아픔보다도 더 컸으며 이로 인한 영적인 왜곡은 심각한 병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우월순 의사는 영적인 치유를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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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부 효천면에서 시작된 애양원의 역사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1904년 2월 목포선교부에서 광주선교부를 개설하기로 하고 벨 목사와 오기연 목사를 파송하였다. 1904년 12월 15일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사택 건축이 완료되었고, 1904년 12월 21일에 이사하게 되었다. 1904년 12월 25일 오전 11시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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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있던 한센병 치료소의 환자 수가 600여 명에 이르자 1925년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산돌길 148] 신풍마을에 터를 닦고 애양원(愛養院)을 건립하였다. 애양원이란 이름에는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고 도우면서 살아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른 말로 ‘사랑의 동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시 돈 77,000원으로 논과 밭 40,000평을 확보하여 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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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목사는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여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바로 정세가 바뀌어서, 손동인·손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 소식을 들은 손양원 목사는 계엄사령관에게 찾아가서 석방을 간청하였다. “내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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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에는 김인권 원장처럼 의사로서 전문성을 갖고 현장에서 생활하면서 장기적으로 자원 봉사하는 분들도 있지만 인근 지역에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헌신하는 무명의 사람들도 많이 있다. 타지역의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도 방학이나 휴가 등에 짬을 내어 봉사 활동을 한다. 아래의 내용은 애양원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나서 소감을 쓴 글이다. “벌써 팔월이네요. 저는 이번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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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한 지 사반세기가 넘게 활동한 애양원 김인권 원장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곳에 평생 둥지를 튼 것은 1980년 공중보건의로 군 생활을 한센병 환자들의 보금자리인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서 하게 된 데서 연유한다. 입대 전 결혼한 부인까지 동참시켜 3년 내내 소록도 관사에서 살았다. 제대한 뒤 1983년 5월부터 국내 최초의 한센병 치료기관인 애양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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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설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첨단 의료기기보다는 의료 선교사들의 직접 임상이 더 효과적이었다. 현재는 나환자 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나 애양원은 풍부하게 축적된 직접 임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피부 치료나 정형 분야에 특화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도에 있는 나환자촌은 향후 활용에 대해 고민이 크지만, 애양원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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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Robert M. Wilson) 의사의 한국 이름은 우월순이다. 우월순은 1907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본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인준받았다. 1908년부터 2년간 1,5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우월순은 1909년 포사이트(Wiley H. Forsythe)가 데리고 온 여성 한센병 환자 치료를 계기로 애양원을 탄생시켰다. 1910년 한 해에 20,000 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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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포사이트(Wiley H. Forsythe)와 더불어 나환자를 돌보던 오웬 선교사가 순회 전도 중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웬의 뒤를 이은 윌슨 선교사가 광주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지어 나환자 10명을 수용하였다. 애양원의 전신인 셈이다. 후에 최흥종과 신정식, 쉐핑과 윌슨 선교사가 모금을 해 나환자 600명을 여천군 율촌으로 옮기면서 애양원이 세워졌다.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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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과 관련된 마을들은 나환자 공동체로서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초기엔 질병이 만연하여 의사인 선교사들만이 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피부병 등 일반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국가 차원에서 해소할 수 없었다. 의료진의 절대적인 부족과 의약품의 상시적인 부족은 일제강점기에 더욱 극심하였다. 당시 선교사들은 질병의 가장 큰 요인으로 한국인들의 위생 관념 결핍을 꼽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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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문순태가 쓴 『성자의 지팡이』는 무등산 속 오두막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단식 중인 최흥종[1880~1966] 목사를 대학교 2학년생 손자 최협이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현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최협 교수가 눈 쌓인 무등산이 펼쳐진 연구실에서 할아버지의 삶을 회고한 것을 소설화한 것이다. 최흥종은 젊은 시절 ‘망치’란 이름으로 장터와 뒷골목을 주름잡던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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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말쯤 손양원 목사, 김정복 목사, 애양원교회 당회, 소록도교회 당회, 상애교회 당회, 대구애락교회 당회가 모여 한센 지도자 양성을 위해 한성신학교를 설립키로 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이를 위해 부흥 집회 때 받은 사례금을 적립해 왔으나 마무리 못하고 순교하였다. 남은 사람들이 유지를 받들어 1955년 4월 한성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59년 3월 26일 제1회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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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환자들의 가족, 이웃들을 비롯한 많은 조력자들이 환자들을 도와주고 함께해 왔다. 포사이트 선교사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지금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한센병 환자와 소아마비나 뇌성마비 등으로 불구가 된 이들을 저렴하게 치료하고 재활시켜 오고 있다. 또 가난하고 소외되고 나이 많은 불구 환자들과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한 복지 의료 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