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2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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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匡 |
이칭/별칭 | 박주광(朴柱匡)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인호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박광, 산남의진 후봉장으로 활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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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8년 1월 - 박광, 광천전투에서 부상당한 후 자결 |
몰년 시기/일시 | 1908년 1월 - 박광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박광,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박광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답곡리 |
활동지 | 박광 - 경상북도 일원[영천, 영일, 청송 등]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산남의진 후봉장 |
[정의]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
[가계]
박광(朴匡)의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답곡리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박주광(朴柱匡)이다.
[활동 사항]
박광은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에 의해 조직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의거할 때 군위와 의흥 지역을 맡아 모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영천과 청송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였다.
1907년 9월 입암 전투에 참전하여 분투하였으나 일본군의 거친 공세에 정용기(鄭鏞基) 대장을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李韓久), 참모장 손영각(孫永珏), 좌영장 권규섭(權奎燮) 등이 전사하고, 정환직 대장이 새로이 의진을 편성하여 조직을 정비하자 그는 후봉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영천 보현산 일대와 영일[현 포항시]의 북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대일 항쟁을 계속 전개하였는데, 1908년 1월 광천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적탄에 맞아 부상당한 뒤 이세기(李世基)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자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