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22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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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霜露齋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우경원 |
[정의]
경북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에 있는 광주 안씨 재사(齋舍).
[개설]
상로재는 조선 숙종 때 성균관 학정(學正)을 봉직한 안후정(安后靜)이 그의 선조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재사이다. 학연사는 광주 안씨 영천 입향조인 안증(安嶒)[1494~1553]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안증의 호는 완귀(玩龜)이며, 남원 부사를 역임한 안구(安購)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인 안구가 김종직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안증은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거쳐 세자 시강원 사서설서(司書說書)가 되었고, 을사사화 후 관직에서 물러나 영천으로 내려와 평생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위치]
상로재는 구암마을에서 경부고속도로 영천 방향의 우측 편 구암안길을 따라 약 1㎞ 직진하면 좌측 편에 터널이 나오는데 이 터널을 통과하여 약 300m 이동한 지점에 있다.
[변천]
광주 안씨 완귀공파 문중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학연사는 입향조인 안증의 사후 2대 후에 초창을 했다고 한다. 학연사 건물은 현재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학연사 좌측에 직각으로 배치된 상로재는 1931년에 중수한 것으로 원래의 규모와 소실 원인은 알 수 없다.
[형태]
상로재는 마을과 떨어진 외진 곳에 있다. 상로재 앞에는 관리사 영역이 있는데 재사 영역과는 담장으로 구분 짓고 담장 가운데 사주문을 설치하여 출입케 했다. 재사 영역에는 상로재와 학연사가 ‘ㄱ’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고, 정면에만 토석 담장이 둘러져 있다.
근래에 복원된 상로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전면에 퇴칸을 둔 전퇴집이며, 실의 배열은 가운데 둔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 방 1칸, 우측에 방 2칸을 드린 형식이다. 가구는 5량 구조로 곡선으로 휘어진 대들보 위에 사다리꼴 형태의 판대공을 놓고 종보를 걸었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다.
학연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실의 배열은 좌측에 방을 1칸 두고 대청을 2칸 연속해서 배치한 형식이다. 정지한 대지에 기단은 전·후 높이차 없이 낮게 축조하였다. 정면 기단부는 외피를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했으며 양 측면과 배면은 기단이 명확하지 않게 훼손되어 있다.
초석은 넓적한 방향의 자연석들을 골라 썼고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의 단면 크기는 지름 250㎜로 규모에 맞는 적절한 것을 사용하였으며 상부로 갈수록 민흘림을 강하게 두었다.
문은 방의 경우 정면 쪽은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청방간 출입문은 아래에 굽널을 끼운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대청 전면은 개방되어 있고 우측 벽면은 판벽으로 꾸미고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대청 뒷벽 어칸에는 미서기 판문을 달고 배면 쪽에 벽장을 증설하였다. 이것은 근래에 보수하면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대청 배면 좌측 벽면은 창호 없이 판벽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기둥 상부 가구 결구는 몰익공으로 앞·뒤 모두 연화형으로 조각된 익공부재를 창방과 직교하여 보 방향으로 끼우고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아래를 둥글게 가공한 행공 부재를 끼워 보를 받게 했다.
가구는 3량 구조로 곡선으로 휘어진 대들보 위에 파련대공을 세워 종보를 받게 한 형식이다. 처마는 서까래만 쓴 홑처마에 맞배지붕 형식이다. 방 내부는 벽지로 마감되어 있으나 외부 건물 내·외부 벽면은 토벽으로 마감되어 있다.
[현황]
상로재 일곽은 주 건물인 상로재와 학연사가 ‘ㄱ’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재사 주변에는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정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담장이 없다. 재사 정면에는 수령이 오래된 향나무가 두 그루 식재되어 있다. 학연사의 지붕은 2011년 문중 운영비로 번와하여 상태가 양호하나, 학연사 앞 사주 문양 옆의 토석 담장은 해방 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계속 훼손이 진행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상로재는 근래에 복원된 건물로 건축적으로 큰 가치가 없으며, 학연사는 조선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재가 남아 있고 건축 기법과 형식이 조선 후기 양식으로 추정되어 건축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