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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205
한자 漢文學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이종문

[정의]

경상북도 영천 출신 작가들이 발표한 한문으로 된 문학 작품과 그 작품 세계.

[개설]

우리나라 한문학(漢文學)의 역사는, 한자가 기원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서서히 도입되기 시작하였으므로, 줄잡아 2천년에 이르고 있다.

영천 지역의 한문학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겠지만, 현존하는 것으로 보면 청지(菁池)의 축조와 중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보물 제517호인 영천 청제비(永川菁堤碑)에 기록된 것이 이 지역 최초의 한자 기록이다. 청제비는 536년(신라 법흥왕 23)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므로 영천 지역에서는 최소한 6세기경부터 한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청제비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록에 불과하므로 이를 두고 본격적인 문학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영천 지역에서, 혹은 영천 지역 출신의 작가들에 의하여 창작된 본격적인 한문학 작품이 확인되기 시작하는 것은 고려 말기부터다. 물론 이것은 그 이전에 영천 지역에서 한문학 창작이 없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마도 신라 시대부터 한문학 작품이 꾸준히 창작되었겠지만, 아쉽게도 문헌 전승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작품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영천 지역의 한문학에 대한 본격적 서술은 고려말기 이후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내용]

영천의 한문학은 고려 말기의 문인인 정몽주(鄭夢周)[1337~1392], 최원도(崔元道), 최원우(崔元祐) 등 몇몇 시인의 작품에서 본격적으로 출발을 했다. 그러나 최원도와 최원우는 극소수의 작품을 남기고 있을 뿐이므로 영천 한문학의 할아버지는 역시 고려 말기 한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서 『포은집(圃隱集)』을 남긴 포은(圃隱) 정몽주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포은집』을 기준으로 할 경우 『포은집』에는 포은이 지은 250여 편의 시와 9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포은집』에 수록되어 그의 시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시는 대체로 호방하고 웅심한 시 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포은의 이와 같은 작품들이 고려 말기 한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각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춘흥(春興)」과 같은 작품은 중등학교 한문 교과서에 오래도록 수록되어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영천의 한문학사에서 포은 다음으로 거론할 만한 작가는 조선 초기 한시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시인인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1388~1443]이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되어 있는 『태재집』에는 태재가 지은 500여 편의 시와 10여 편의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태재가 조선 초기의 시단에서 주목할 만한 활약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서거정(徐居正), 권람(權擥) 등 조선 초기 문단을 주도한 빼어난 문인을 배출했던 점을 고려하면, 『태재집』은 당시 문학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자료다. 그가 송시풍(宋詩風)이 대세를 이루던 조선 초기 문단에서 당시풍(唐詩風)의 흐름을 여는 데 물꼬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더욱더 그러하며, 영천 지역에서 창작한 시가 많다는 점에서 영천의 문학에서 그의 시들이 지닌 의미는 매우 큰 것으로 판단된다.

태재에 이어 영천 지역과 연고를 가진 중요한 작가로는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을 들 수가 있다. 그는 성리학 등 다방면에 걸쳐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학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60여종 200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남긴 대저술가다.

병와의 문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보면, 한문학의 각종 갈래들을 다양하게 포괄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다수의 악부시를 포함한 한시들이다. 그의 한시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성고구곡(城皐九曲)」, 「성고잡영(城皐雜詠)」, 「구곡만팔기(九曲灣八磯)」, 「병와팔영(甁窩八詠)」, 「한중잡영(閑中雜詠)」 등의 연작시들은 모두 우주적 이법(理法)의 현현체인 자연 속에서의 삶을 노래한 한아(閒雅)한 풍격(風格)의 작품들이다.

아울러 주목되는 것은 병와가 적지 않은 악부시를 남겼다는 점인데, 이것은 그가 유달리도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병와의 한문학 작품들은 영천에서 창작된 것이 많은데다가 그 창작 현장인 호연정(浩然亭)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영천의 한문학 작가들이 여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영천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한문으로 쓴 문집을 남겼고, 그 문집에는 많든 적든 한문학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1660~1720],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1664~1730],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1667~1732],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1685~1757], 명암(明庵) 이태일(李泰一)[1860~1944], 낭산(朗山) 이후(李垕)[1870~1934] 등이 대표적이며, 아울러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같은 경우는 국문 문학의 빼어난 대가였지만, 한문학 작품을 적지 않게 남기기도 했다.

한편, 다른 지역 인사들이 영천에 와서 남긴 한문학 작품들도 적지 않은데, 영천의 조양각(朝陽閣)과 신녕의 환벽정(環碧亭)에 걸려 있는 한시문(漢詩文)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조양각이나 환벽정처럼 많은 시인들의 작품이 아직도 현액으로 걸려 있는 경우는 전국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조양각에서 시문을 남긴 인물들 가운데는 정몽주(鄭夢周), 유방선(柳方善), 박인로(朴仁老) 등 영천 사람 이외에도, 서거정(徐居正),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이현보(李賢輔), 이행(李荇), 이이(李珥), 이안눌(李安訥), 남공철(南公轍), 조긍섭(曺兢燮) 등 우리나라 문학사와 정신사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신녕의 환벽정에서도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상용(金尙容), 홍익한(洪翼漢), 남구만(南九萬), 송준길(宋浚吉) 같은 저명 인사들이 시문을 남겼다. 그러므로 이들 외부 인사들이 영천에 미친 문화적 충격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황]

한문학은 20세기 이후 한글이 한문을 대신하여 보편적인 표기 수단으로 정착되고 서구 문화가 도래하면서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은 영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본다면 영천 지역은 아직도 한문학의 전통이 맥맥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곳이다. 우선 영천 지역에는 아직도 동원(東園) 이진기(李震基)를 중심으로 한 조양시사(朝陽詩社)에서 전국 한시 백일장과 정기적인 한시 강습회를 열고 있고, 영천향교에 부설된 국학학원에서도 한문 강좌와 함께 한시 창작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이처럼 영천 지역에 한문학적 전통이 유달리도 강하게 계승되고 있는 것은, 물론 포은 정몽주 이래의 영천 지역 작가의 왕성한 창작 활동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근세에 많은 문하생을 길러 낸 동주(東洲) 최석기(崔碩基)중재(中齋) 이호대(李好大)의 교육 활동에 힘입은 바가 크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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