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2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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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時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집필자 | 이종문 |
[정의]
경상북도 영천 출신 시조 시인들이 지은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
[개설]
시조(時調)는 고려 말엽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를 거치는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고, 현재도 많은 시인들에 의하여 창작되고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 시가다. 우리나라 문학사에는 향가·고려가요·가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전 시가 갈래들이 다채롭게 등장했으나,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는 유일한 국문시가 갈래가 시조라는 점에서, 시조는 한국의 시가 문학을 대표하는 갈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영천은 우리나라 시가 문학의 대표적인 갈래인 시조 문학의 성지(聖地) 가운데 하나라고 이를 만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시조 문학사를 대표하는 주옥 같은 작품들, 장기간에 걸쳐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대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작품들 가운데 영천 출신 인물들에 의하여 창작된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영천의 시조]
1) 역사 시대
영천의 시조 문학사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 이씨(李氏)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에서 시작되는데, 이 작품은 초창기 시조 문학사에 등장한 빼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다. 더구나 「백로가」는 그 내용이 혐오스런 세속 세계를 떠나 청정하고 고고한 삶을 추구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삶의 양식에 부합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조선조에서도 널리 불리어졌고, 오늘날까지도 널리 애송됨으로써 국민들의 정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영천의 시조 문학사에서 「백로가」에 이어 등장한 작품은 포은 정몽주가 지은 유명한 「단심가(丹心歌)」이다. 「단심가」는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이성계(李成桂)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의 속마음을 떠보고 회유하기 위하여 「하여가(何如歌)」를 부르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 즉석에서 지어 불렀다는 노래다.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등 역대 시조집에 두루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문헌에 한역시가 수록되어 있기도 한 이 작품은 초창기 시조를 대표하는 가작으로서 고려 말에 새로 등장한 시조가 역사적인 갈래로 정착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더구나 이 작품은 조선조의 개국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그 내용이 유교적 질서에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조에서도 널리 불려졌고, 해방 후 오래도록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대중들의 상식이 되어 있는 ‘국민시조(國民時調)’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천의 시조 문학을 꽃피웠던 명실상부한 전문 작가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조선 시대의 시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1561~1642]이다.
가사 문학의 대가였던 박인로는 「태평사(太平詞)」, 「사제곡(莎堤曲)」, 「누항사(陋巷詞)」, 「선상탄(船上嘆)」,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노계가(蘆溪歌)」, 「입암별곡(立巖別曲)」, 「소유정가(小有亭歌)」 등의 주옥 같은 가사를 남겼으며, 근년에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증손 이윤문(李允文)이 1690년(숙종 16) 영천 군수로 있으면서 영천에서 간행한 『영양력증(永陽歷贈)』에서 「권주가(勸酒歌)」, 「상사곡(相思曲)」 등 두 편의 가사가 새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조 가사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이기도 했던 노계는 「조홍시가(早紅柹歌)」, 「오륜가(五倫歌)」, 「입암가(立巖歌)」 등 70여 편의 시조를 남긴 걸출한 시조 작가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 효도라는 유교 윤리를 감성적인 언어로 시적 구도 속에 포착한 「조홍시가」는 효도를 주제로 한 우리나라 고전 시가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작품 중 하나로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국어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국민들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쳤던 작품이다.
「오륜가(五倫歌)」는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를 노래한 각각 다섯 수와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노래한 두 수, 총론(總論) 세 수 등 모두 스물다섯 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예술적 가치는 덜하지만 유교적인 윤리 의식이 오롯이 담겨 있다.
「입암가」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은거하던 영천 입암[현 포항시 죽장면]에서 지은 스물아홉 수의 시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속적 현실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 자유 공간인 입암 일대의 풍경들을 시적 구도 속에 포착하였다.
우리나라 시조사에서 「백로가」, 「단심가」, 「조홍시가」 등 영천의 선인들이 남긴 시조 작품들이 지닌 의미는 아주 각별하다. 우선 이 작품들은 국문학사 서술에서 어김없이 거론되는 중요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대단히 크다. 게다가 이 시조들 모두를 ‘국민시조’로 불러도 좋을 만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작품이므로 국민들의 정서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현대
고시조가 지닌 위상에 비하여 영천의 현대 시조는 크게 위축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999년 공영해[『시조문학』 등단], 김미정[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김해석[등단 연도 미상], 노종래[1994년 『문학세계』 등단], 원정호[1996년 『현대시조』 등단], 이종문[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정남채[1991년 『월간문학』 등단], 조명선[1993년 『월간문학』 등단], 조순호[1993년 『문학세계』 등단], 조영두[1996년 『시조문학』 등단], 조주환[1976년 『월간문학』 등단], 조창환[1989년 『시조문학』 등단], 지준모[196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황외순[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이상 가나다 순]이 등장하여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여 왔다.
그 가운데서 조주환(曺柱煥)은 맥시조문학회 창립 회장, 영남시조문학회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경상북도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시조 창작과 시조 문단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한 시조 시인이다. 그는 『길목』, 『사할린의 민들레』, 『독도』 등의 시조집을 간행했으며,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시리즈의 하나로 『소금』을 간행하기도 했다.
노종래는 영남시조문학회 회장, 경주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시조를 창작해온 시인으로 『꽃빛깔로 흔들다』, 『일어서는 풀잎무늬』 등의 시조집을 간행하였다.
창원문인협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공영해는 『일어서는 풀잎무늬』, 『낮은 기침』 등의 시조집을 간행한 바 있다.
이종문은 『저녁밥 찾는 소리』, 『봄날도 환한 봄날』, 『정말 꿈틀, 하지 뭐니』 등의 시집을 간행했는데, 그 가운데 『저녁밥 찾는 소리』는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시리즈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천 출신의 시조 시인 가운데 젊은 층에 속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통하여 시조단의 주목을 받고 있고,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되는 시인으로는 조명선과 김미정을 들 수가 있으며, 그들은 각각 『하얀 몸살』과 『고요한 둘레』를 간행한 바 있다.
[의의와 평가]
시조 문학의 발생 시기가 고려 말이라는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영천의 시조 문학사는 한국의 시조 문학사와 그 출발을 같이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백로가」와 「단심가」의 창작 시기가 바로 고려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조 부흥 운동을 위해 시조 문학상을 제정하고 시조 축제를 개최하는 등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해남·익산·청도·김천 등의 지자체 가운데서 시조 문학의 역사가 영천만큼 긴 곳은 어디도 없다.
다만 고산 윤선도, 가람(嘉藍)[또는 柯南] 이병기(李秉岐), 이영도(李永道)와 이호우(李鎬雨), 백수(白水) 정완영(鄭椀永)이 그곳에 평지 돌출처럼 등장했고, 각 지자체들이 그들을 구심으로 하여 자신의 고을을 시조의 성지로 만들어 나가고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영천의 시조는 그 역사적 전통이 앞의 고을들과는 크게 다르다. 게다가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영천의 시조 시인들이 남긴 작품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문학사와 교과서에 오르내림으로써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국민 시조’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영천의 시조 문학이 차지하는 시조사적 위상은 남다른 바가 있다.
현대에 와서는 과거의 이와 같은 눈부신 전통이 다소 퇴색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괄목할 만한 창작 활동을 벌이고 있는 시조 시인들이 여럿 있다. 따라서 지자체와 시조 시인들이 지혜를 모으고 합심하여 노력을 기울인다면 영천이 옛날의 영광을 재현하여 시조의 총본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지방 자치 단체의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바탕으로 노계 시조 문학상[가칭]을 재정하는 일이다. 노계 만한 대가를 가진 고을 가운데 문학상 제정 등 그를 위한 정기적인 행사를 전혀 가지지 않고 있는 고을은 아마도 영천밖에 없을 것이다.
시조 창작 교실 운영, 시조 백일장과 시조 축제 개최 등을 통하여 시조 창작의 붐을 조성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영천이 시조의 메카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전제가 시조 시인들의 치열한 시정신과 뼈를 깎는 노력에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