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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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信愛 |
이칭/별칭 | 무잠(武潛),백무동(白戊東),박계화(朴季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상규 |
출생 시기/일시 | 1908년 5월 20일 - 백신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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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3년 3월 25일 - 백신애 영천보통학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24년 3월 25일 - 백신애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백신애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성청년동맹 상임 위원에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939년 6월 25일 - 백신애 사망 |
출생지 | 백신애 -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 |
관련 유적 | 백신애문학비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
성격 | 소설가 |
성별 | 여 |
저술 | 『낙오(落伍)』 외 다수 |
[정의]
근대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소설가.
[개설]
백신애(白信愛)의 아명은 무잠(武潛), 호적명은 백무동(白戊東)이며, 1908년 5월 20일 경상북도 영천군 창구동 68번지에서 태어나 1939년 6월 25일 사망했다. 아버지 백내유(白乃酉)와 어머니 이내동(李內東)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으며, 5살 위의 오빠 백기호(白基浩)가 있다.
[활동 사항]
백신애(白信愛)는 1915년 8세 때부터 이모부인 김씨를 독선생으로 두고 집에서 한문을 배웠다. 11세 되던 1918년에는 백무잠(白武潛)이란 이름으로 영천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으나 1919년 중퇴하였다. 중퇴 사유는 대구신명학교 전학이었으나 사실은 건강이 좋지 않은 때문이었다.
1919년부터 3년간 집에서 한문 수학과 함께 일본의 중학 강의록으로 공부했다. 15세가 되던 1922년 12월 무동(戊東)이라 이름을 바꾸고 출생년도를 1906년으로 고쳐 영천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출생년도 변경 사유는 17세 이상만 입학할 수 있도록 한 조건 때문이었다.
1923년 3월 25일 영천보통학교 4년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28일 경상북도 공립사범학교 강습과에 40명 중 홍일점으로 입학하였다. 17세인 1924년 3월 25일, 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영천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였는데, 경상북도에서 첫 번째 여교사이다.
18세인 1925년 3월 31일 경산군 자인보통학교로 전임하는데, 이때 이력서 구성명(舊姓名)란에 백신애란 이름이 보인다. 19세인 1926년 1월 22일, 겨울방학 중 영천에서 조선여성동우회 영천지회를 조직한 것이 탄로나서 권고사직을 받고 곧바로 상경하여 조선여성동우회와 경성여성청년동맹 상임위원이 된다.
같은 해 2월 25일 천도교회관에서 경성여성청년동맹 2주년 기념식에 단독으로 집회 허가를 받아내고 혼자서 대회를 치른 후 일경(日警)의 감시 대상이 된다.
19세인 1926년부터 전국 순회강연 등 여성운동을 전개하는데, 김천강연회는 시인 백기만(白基萬)이 주선하였다. 백기만의 『씨 뿌린 사람들』[1951]에는 경북 출신의 문인들 중 고월 이장희, 육사 이원록, 백신애 3명을 친일하지 않은 독립지사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백신애는 4~6개월 동안 시베리아 방랑시기를 거쳤다가 두만국경(豆滿國境)에서 왜경에 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입원하였다. 21세인 1928년에 병원에서 퇴원, 영천으로 돌아와 문학 수업 겸 여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22세 때인 1929년 1월 1일 박계화(朴季華)란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의 어머니』가 당선하여 문단에 데뷔하고, 23세 때인 1930년 3월 온 가족이 경산군 안심면 용계동의 과수원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를 했으며, 5월 경 일본 동경의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여 문학과 연극을 공부하지만 아버지가 학비를 끊어 1931년 24세 때 귀국하였다.
그러나 부모의 결혼 강요에 못 이겨 다시 도일하였다가 1932년 25세가 되던 가을에 귀국하여 동래고보와 오사카[大阪]상고 출신인 은행원 이근채(李根采)와 약혼하고, 이듬해 봄 대구공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34년 27세 되던 해 1월, 단편 『꺼래이』를 발표하고, 3월에 안심면 송전마을 사과밭의 신축가옥으로 남편과 이사하여 단편 『복선이』, 중편 『정조원』 연재 1회, 단편 『채색교』·『적신』·『낙오』를 발표한다.
1935년 28세 되던 해 1월 소년소설 『멀리 간 동무』를 발표, 7월 31일~8월 1일에는 『동아일보』에 꽁트 『상금 삼원야』를 발표하였다. 8월에는 장편 『의혹의 흑모』 1회 연재, 단편 『악부자』·『정현수』를 발표한다. 그해 12월 아버지가 일본 규슈제국대학병원에서 사망한다.
1936년 29세 되던 해 1월에는 삼천리사 초청 여류작가 좌담회에 참석했는데, 이날 사회는 김동환이 맡았고 박화성·이선희·모윤숙·장덕조·최정희 등이 참석했다. 같은 해에 단편 『학사』·『식인(食因)』[‘호도’로 개작, 여류 단편 걸작집에 수록]·『어느 전원의 풍경』을 발표하고, 1937년 30세 되던 해 6월 꽁트 『가지말게』를 발표하였다.
31세 되던 1938년 5월경에는 남편과 별거에 들어가 용계동의 친정으로 돌아와서 단편 『광인수기』를 조선일보에 10회 연재하고, 단편 『소독부』·『일여인』을 발표했다.
9월 25일에는 병원에서 퇴원하고 5일 후 인천항에서 중국 칭따오[靑島]로 간다. 10월 16일부터 약 40여 일에 걸친 여행을 하여 상해에 도착해서 오빠 백기호와 만나고 상해 체류 중 집사를 시켜 이혼 수속을 밟도록 한다.
1939년 32세 되던 5월 단편 『혼명에서』를 발표하고, 5월 말경 위장병으로 경성제국대학병원에 입원하여 6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11월에는 유작인 중편 『아름다운 노을』이 『여성지』에 3회 분재(分載)되었다.
[저술 및 작품]
주요작품으로는 전기 외에 『낙오(落伍)』, 『정현수(鄭賢洙)』, 『정조원(貞操怨)』, 『호도(糊塗)』, 『광인수기(狂人手記)』, 『소독부(小毒婦)』, 『채색교(彩色橋)』, 『혼명(昏冥)에서』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2007년 백신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백신애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2008년에는 영천시 교촌동 시민운동장 근처에 백신애문학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