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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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再萬 |
이칭/별칭 | 조용찬(曺瑢燦),조충환(曺忠煥),봉헌(奉憲),백농(白聾)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인호 |
출생 시기/일시 | 1906년 10월 26일 - 조재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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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3년 - 조재만 백학학원 졸업 |
수학 시기/일시 | 1924년 - 조재만 대구공립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조재만 대구에서 장진홍·이정기·이육사와 비밀결사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10월 - 조재만 중국으로 망명 조선인군관학교 설립추진 등 항일운동 전개 |
수학 시기/일시 | 1926년 - 조재만 휘문고보 재학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 조재만 친일교장 배척사건으로 휘문고보 제적, 재경영천학우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8월 - 조재만 귀국하여 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모금 운동전개 중 장진홍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으로 체포됨 |
몰년 시기/일시 | 1990년 5월 5일 - 조재만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조재만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2002년 4월 - 조재만 추모비 건립 |
출생지 | 조재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
활동지 | 조재만 - 중국|대구|영천 |
묘소 | 조재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선산 |
소재지 | 추모비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대표 경력 | 산동학원 재단이사장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재만(曺再萬)은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 및 조선인군관학교 설립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조재만(曺再萬)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봉헌(奉憲), 호는 백농(白聾), 또 다른 이름으로 조용찬(曺瑢燦) 또는 조충환(曺忠煥)을 사용하였다. 1906년 지금의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현고]에서 태어났으며 1990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조병국(曺秉國)과 어머니 풍산 유씨(豊山柳氏)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조재만(曺再萬)은 1925년 9월 대구에서 장진홍(張鎭弘)·이원록(李源祿)·이원기(李源祺) 등과 함께 조직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휘문고보 재학 당시 친일교장 배척 사건을 주도하다가 제적당하였다.
1926년 융희황제 국장일(國葬日)에 6·10 만세 운동이 거국적으로 전개되자 비록 제적은 당했으나 휘문고보 학생들과 결탁하여 적극 참여하는 한편, 재경영천학우회를 조직하여 비밀 지하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26년 10월경 이정기(李定基)·이육사(李陸史)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임시정부 요인 및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강력한 무력 투쟁만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조선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1927년 8월 군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귀국한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조직한 재경영천학우회를 중심으로 모금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7년 10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이육사·이원기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28년 1월 대구지검으로 이송된 그는 소위 폭발물 취체규칙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1931년 봄 다시 북경으로 망명 도중 발각되어 3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지역민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 계몽사상 교육에 앞장섰다.
[묘소]
조재만의 묘소는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현고]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며, 2002년 4월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에서 영천시 화남면 산동중학교, 영천전자고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