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401 |
---|---|
한자 | 姜鳳鶴 |
이칭/별칭 | 강봉은(姜鳳殷)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인호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 강봉학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3월 - 강봉학 산남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함 |
몰년 시기/일시 | 1914년 10월 11일 - 강봉학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9년 - 강봉학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11월 - 강봉학 추모비 건립 |
출생지 | 강봉학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 |
활동지 | 강봉학 활동지 - 경상북도 영천·영일·청송 일대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정의]
조선 말기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
[개설]
강봉학(姜鳳鶴)은 정환직(鄭煥直)과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에 의해 영천에서 거의한 의병조직인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활약한 의병으로 1890년 지금의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군자금 활동으로 피체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순국하였다.
[가계]
강봉학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강봉은(姜鳳殷)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1906년 3월 고종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과 그의 아들 정용기에 의해 경북 영천에서 산남의진을 결성하자 강봉학은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흥해 우편국 분파소를 습격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사살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신녕 분파소를 기습하여 총기 60여 점을 노획한 것을 비롯하여 청송군 유전 일대와 영덕 일대에서 일본군을 기습하여 적병 20여명을 사살하는 등 흥해·신녕·청송·영덕 등지에서 일경 분파소 습격 및 일본군 기습 공격에 참여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군에 피체되어 1909년 2월 2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감형으로 만기 전에 출옥한 그는 대일 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계속하여 군자금을 수합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피체되어 1914년 7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0월 14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 11월 영천항일운동선양사업회에서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