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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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조인호 |
[정의]
경상북도 영천 출신 또는 외지 출신으로 영천 지역 내외에서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국권 회복 운동과 독립 쟁취를 위해 활동한 인사들.
[개설]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이요, 호국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영천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한말에는 의병 항쟁을 전개하여 국권 회복 운동에 앞장섰으며,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한 일제 강점기에는 3·1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학생운동과 의열 투쟁, 무력 항쟁, 계몽 운동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내용]
1. 국권 회복 운동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노골화하자, 이에 대항하여 각지에서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고종 황제의 측근이었던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그의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1906년 3월 그의 고향인 영천에서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명하고, 주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그 규모가 1,000여명에 이르렀으며 1906년 3월에 거의하여 1908년 7월까지 활동한 한말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진이었다. 산남의진에서 활약한 영천 출신 의병으로는 정환직(鄭煥直)[제2대 의병장], 정용기(鄭鏞基)[제1대 의병장] 부자를 비롯하여 강봉학(姜鳳鶴), 좌영장 권규섭(權奎燮), 김수곡(金水谷), 후봉장 박광(朴匡), 청도·밀양 소모책임자 박한종, 우영장 이규필(李圭弼), 영천 남부 지역 책임자 이형표·전응팔(全應八), 도포장 조상환(曺相煥), 후봉장 최치환(崔致煥)·황보근 등이 있다.
이외에 구봉서(具鳳瑞)는 산남의진과는 별개로 영천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학로(李學魯)는 경남 산청과 함안의 의병장 박동의 의병 부대의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김동필(金東弼)은 을사늑약의 파기와 을사 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을사늑약 강제 체결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2. 1910년대의 항일 운동
신녕공립보통학교의 교사 박필환(朴弼煥)과 황영수(黃英秀)를 비롯한 김호용·박칠성·김해오·구위준·조율이 등 20여 학생들, 그리고 김준운(金俊運)이 신녕 지역에서 3·1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홍종현·조병진 등은 영천 장날을 기해 영천 창구동 소재 영천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김낙헌(金洛憲)은 거동서당 학생들을 규합하여 영천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정재호(鄭在浩)는 1919년 유림단(儒林團)의 독립 청원 운동, 일명 파리장서(巴里長書)에 137명과 함께 서명하였다.
3. 1920년대의 항일 운동
영천의 3·1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홍종현(洪鍾顯)은 6·10 만세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조재만(曹再萬)은 조선인군관학교 설립 자금 모금을 전개하던 중 1927년 10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김기용(金基用)은 영천경찰서와 친일 부호에 대한 투탄 미수 사건으로 피체되었으며, 황보선과 한상택은 학생 항일운동 단체인 혁우동맹과 적우동맹 간부로 대구고보 동맹 휴업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여러 개의 청년 단체들이 조직되어 민중 계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신형섭(申亨燮)은 대한통의부 군자금 모금 사건, 일명 창수 사건에 연루되었다.
4. 1930년대 이후의 항일운동
김영길(金永吉)과 이영환(李榮還)은 영천의 일본 신사 방화 사건을 주도하였으며, 권태용(權泰容)은 일본 병영을 탈출하여 국외로 망명을 꾀하다가 신녕 뒷산에서 피체되었다. 또한 정원흥은 동촌비행장 폭파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피체되었으며 황보선(皇甫善)은 백의민족 진흥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5. 국외의 항일 운동
1)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
이범교(李範敎)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설립한 교통부의 교통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러시아령에 배영학교를 세워 민족의식 고취 교육에 힘썼다. 정재호(鄭在浩)는 북로군정서와 연통제, 정의부에 가담하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김상률(金相律)은 대한독립단과 의군부에서 활동하고, 손병헌(孫炳憲)은 한교공회 설립을 주도하고 통의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진영(李進榮)은 조선의용대 중경 판사처 주임과 통신처 의창주임을 거쳐 한국광복군 부령으로 대일 항쟁을 전개하였으며, 이원대(李元大)는 조선의용대[군] 분대장으로 산시성[山西省]과 허베이성[河北省] 변경의 타이항산[太行山]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2) 일본에서의 항일운동
일본에서는 조병화와 정규식이 오사카 지역을 중심으로 한인 학생들과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의 함양을 위한 계몽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