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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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泰一 |
이칭/별칭 | 삼수(三叟),명암(明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860년 10월 15일 - 이태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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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3년 - 이태일 향 백일장에서 장원 |
활동 시기/일시 | 1888년 - 이태일 성시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8월 30일 - 이태일 사망 |
출생지 | 이태일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원각(元覺)마을 |
묘소|단소 | 이태일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원각마을 |
사당|배향지 | 용산정사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벽진 |
저술 | 『명암전서(明庵全書)』|『정학통록(正學通錄)』|『태평책(太平策)』|『대학회의(大學會疑)』|『주역회의(周易會疑)』|『홍범정오(洪範正誤)』|『태극해(太極解)』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이태일(李泰一)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삼수(三叟), 호는 명암(明庵)이며, 1860년(철종 11) 10월 15일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원각(元覺)마을에서 태어나 1944년 8월 30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이인호(李仁浩), 증조는 이재장(李載璋), 조부는 이진현(李鎭鉉)이다. 아버지는 이승원(李承源)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 徐氏)로 사인(士人) 서상호(徐相鎬)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권승운(權昇運)의 따님으로 슬하에 후사가 없어 아우 이채일(李彩一)의 아들 이원형(李元亨)으로 뒤를 이었으며, 또 한 부인은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아들 이원휘(李元徽)를 두었으며, 사위는 조기환(曺其煥)·이석형(李錫瀅)·정재홍(鄭載弘)이다.
[활동 사항]
이태일은 어릴 때 왕고(王考)에게 수학하고, 후에 권재동(權載東)에게 사사하여 1873년(고종 10) 향(鄕)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다. 1888년 성시(省試)에 합격하고, 1889년 과거를 보았으나 명분이 문란하고 재물로 벼슬을 매매함에 울분을 느껴 “군자가 세상에 나올 때가 아니다”라고 하며, 답지를 불태우고 귀향하여 두문불출하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안동 예안의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석호(石湖) 유도성(柳道性),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며, 오직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1909년(순종 3)에 문묘(文廟) 수임(首任)을 맡았으나, 이듬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만두고 돌아 왔다. 1913년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기념장(記念章) 훈패(勳牌)를 국내의 큰 선비들에게 반사(頒賜)할 때, 이태일이 두세 차례 거절하자 군수와 서장이 편지하여 훈패를 받으라고 하는 등 협박이 있었으나 끝내 받지 않았으니, 일본인도 ‘충의와 도덕을 갖춘 선비’라 하며 물러났다.
[학문과 저술]
석판본인 『명암전서(明庵全書)』가 남아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정학통록(正學通錄)』, 『태평책(太平策)』, 『대학회의(大學會疑)』, 『주역회의(周易會疑)』, 『홍범정오(洪範正誤)』, 『태극해(太極解)』 등이 있다.
[묘소]
이태일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원각(元覺)마을 북쪽 해산(亥山)에 있으며, 영가(永嘉) 권상규(權相圭)의 갈문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용산리(龍山里)에 용산정사(龍山精舍)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