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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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景溫 |
이칭/별칭 | 여율(汝慄),임계(林溪)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미애 |
출생 시기/일시 | 1548년 5월 9일 - 조경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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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경온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
묘소|단소 | 조경온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매곡(梅谷) |
사당|배향지 | 회계서원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
사당|배향지 | 임계정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자.
[가계]
조경온(曺景溫)의 본관은 창녕. 자는 여율(汝慄), 호는 임계(林溪)이며, 1548년(명종 3) 5월 9일에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에서 태어났다. 고조는 장사랑(將仕郞) 조계조(曺繼祖)이며, 증조는 정릉참봉(貞陵參奉) 조응하(曺應河), 조부는 경릉참봉(敬陵參奉) 조영(曺英)이다. 아버지는 정릉참봉(貞陵參奉) 조희장(曺希章)이며, 어머니는 의인(宜人) 부평 유씨(富平柳氏)로 장령(掌令) 유세춘(柳世春)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월성 최씨(月城崔氏)로 부사직(副司直) 최삼고(崔三顧)의 딸로 슬하에 6남을 두니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조축(曺舳), 통정랑(通政郞) 조의(曺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조항(曺航), 조방(曺舫), 함평훈도(咸平訓導) 조황(曺艎), 조확(曺艧)이다.
[활동 사항]
조경온은 어릴 때부터 효성이 남달라 5살 때 새끼 까마귀가 어미 까마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 조희장에게, “짐승도 저리 할진데 하물며 사람이 되어 짐승보다 못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여 이웃사람들에게 효자라고 칭찬을 받았다.
소학을 배우고는 그대로 실천하였고,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부모를 정성껏 모셨으며, 장가를 들어 첫아들을 낳자 아내 최씨에게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어릴 때에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나 아내와 자식을 얻고 나면 그 마음이 아내와 자식에게 돌아간다는데 내가 그렇게 될까 심히 걱정이오”하니, 부인이 대답하기를, “지아비께서 효성이 지극하신데 어찌 그렇게 되겠어요”라 답하여 주변에서는 과연 그 지아비에 그 지어미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580(선조 13) 그가 32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에 잠겨서도 묘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으니,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하늘이 낳은 효자를 위문하기 위해 왔노라”하며 묘를 구해 주니 지금의 화남면 귀호리로 속칭 ‘어둡이’ 마을이다.
이에 조경온은 “아버지의 살갗이 닿는 흙인데 어찌 남에게 맡기겠느냐”하면서 흙을 채로 쳐서 깨끗하고 부드럽게 하여 장례를 마치고는, 낮에는 종일토록 아버지의 은덕을 기리며 묘소를 지켰으며, 밤에는 빈소를 떠나지 않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병환으로 누운 어머니가 고기를 원하자 무턱대고 집을 나서니 난데없이 꿩 한 마리가 기어들어와 나뭇단 사이에 숨는지라 이를 잡아서 드리니 병세가 나아졌다고 한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고을 사또도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곡식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지극 정성으로 장례를 치르고 또 다시 3년간 여묘를 살았다.
이후 묘소 인근에 영모재를 짓고 『소학훈의』라는 책을 만들어 자손들이 성묘를 마치고 나면 틈틈이 익히게 하여 효도하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잔악한 왜군에 의해 전국토가 짓밟히고 양민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왜군은 노략질을 일삼고 보물을 찾는다며 조상 숭배를 위해 만든 묘소를 닥치는 대로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고 다녔다.
이에 조경온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어찌 적의 무리를 겁내어 부모의 산소를 그냥 두고 피난을 가겠느냐. 평생에 못 다한 효도를 하겠노라”며 묘소 앞을 떠나지 않았다.
이때 우리 강토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많은 의병들이 일어나 왜군과 전투를 시작하였는데, 조경온과 사돈 사이인 의병장 권응수(權應銖)가 찾아와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나온다고 하니 함께 왜군과 싸웁시다”라고 수차례 권하였다.
하지만 조경온은 부모의 산소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가지 못함을 이해하여 달라고 얘기하고, 세 번이나 의병들이 싸울 계책을 편지로 전하고 장성한 맏아들 조축을 권응수 휘하에 출전시켰다.
어느 날 낮에 왜군들이 산소 앞에 들이닥쳤으나 조경온은 조금도 놀라거나 겁내지 않고 단정히 묘소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왜군들이 고함을 지르며 창칼로 위협했으나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늠름한 모습을 유지하자, 왜군들도 탄복을 하며 돌아갔다.
그날 해질 무렵 또 다른 왜군 무리가 들이닥쳐 창칼로 위협을 하였으나 조경온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태연히 앉아있었다. 이에 왜군 한 명이 창으로 그를 찔러 산소 앞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를 본 다른 왜군들은 “어찌하여 만고의 효자를 해치느냐?”며 꾸짖고는 근처에 있던 절의 스님에게 간호해 줄 것을 부탁하고는 급히 그곳을 떠나버렸다.
조경온은 스님의 지극한 간호를 받았으나 “가난한 선비가 나라의 원수 왜놈의 창칼을 맞아 쓰러져 나라에 충성을 다 못 하는 것이 안타까우나, 부모님 산소 기슭에서 죽게 되니 그나마 다행이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영천성 복성에 성공한 권응수 의병장은 이 소식을 듣고 단걸음에 달려와 “살아서는 효행을 다하고, 죽어서는 절의를 다해 우러러보나 굽어보나 조금도 부끄럼 없는 생애를 마쳤노라”며 슬퍼하였다.
[묘소]
조경온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매곡(梅谷)에 있으며, 판서(判書) 이태화(李泰和)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공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뒤에 다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현재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삼창리 회계서원(晦溪書院)에서 선생의 제사를 받들고 있으며, 후손들이 삼창리 마을 입구 ‘붕어덤’ 언덕 위에 임계정(林溪亭)을 지어 추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