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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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辛得龍 |
이칭/별칭 | 백운(伯雲),야은(野隱) |
분야 |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미애 |
출생 시기/일시 | 1566년 10월 14일 - 신득룡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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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신득룡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킴 |
몰년 시기/일시 | 1628년 10월 4일 - 신득룡 사망 |
출생지 | 신득룡 - 경상북도 영천시 망정동 |
묘소|단소 | 신득룡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가수리 |
성격 | 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영산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효자.
[개설]
영산 신씨(靈山辛氏)의 시조는 고려 인종(仁宗) 때 중국에서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한 후 문과에 급제하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정의(貞懿)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신경(辛鏡)이다.
후손들은 시조 신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靈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8세(世) 전교령(典校令) 신지화(辛至和)의 아들 대에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낸 신천(辛蕆)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德齋公派)와 좌찬성(左贊成)을 지내고 영산부원군(靈山府院君)에 봉해진 신혁(辛革)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草堂公派) 등으로 분파(分派)되었는데 경상북도 영천에 세거하는 영산 신씨는 초당공파 후손이다.
[가계]
신득룡(辛得龍)의 자는 백운(伯雲), 호는 야은(野隱)이다. 1566년(명종 21) 10월 14일에 영천의 동쪽 내동리(內東里)[영천시 망정동]에서 태어나 1628년(인조 6) 10월 4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수의부위(修儀副尉) 신형(辛衡), 증조는 종사랑참봉(從仕郞參奉) 신언륜(辛彦倫)이니 영천 입향조이며, 조부는 종사랑참봉(從仕郞參奉) 신두(辛斗)이다.
아버지는 사재감주부(司宰監主簿) 신응란(辛應蘭)이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김언신(金彦臣)의 딸이다.
부인은 영천 최씨(永川崔氏)로 최억령(崔億齡)의 딸이며, 슬하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익돈(辛益敦)이 있다.
[활동 사항]
신득룡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고 어머니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약을 만드니 병이 즉시 나았다. 상을 당하여서는 슬퍼함을 지극히 하였으니, 관청에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에서는 조정에 포상을 상신하니 복호(復戶)를 명하고 훈도(訓導)를 제수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아우 신준룡(辛俊龍), 재종제(再從弟) 신택룡(辛澤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서울에 다다를 즈음에 화의(和議)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
일찍이 임고 서원에서 성립(成立)·정사진(鄭四震)·전삼성(全三省) 등과 더불어 강독하였으며 곤궁한 사람의 구휼에 앞장섰다.
[묘소]
신득룡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가수리 박달봉에 갑좌(甲坐) 향으로 있으며, 벽진(碧珍) 이종기(李宗基)의 갈문(碣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