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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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遂 |
이칭/별칭 | 여성(汝成),소암(小庵),사곡(沙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515년 - 노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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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53년 - 노수 사마시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84년 9월 19일 - 노수 사망 |
수학|강학지 | 강정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직천리 |
묘소|단소 | 노수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직천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광주 |
저술 | 『소암유고(小庵遺稿)』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노수(盧遂)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여성(汝成), 호는 소암(小庵) 또는 사곡(沙谷)이며, 1515년(중종 10)에 태어났다. 고조는 성균 생원(成均生員) 노갑생(盧甲生)이고, 증조는 사간(司諫) 노선경(盧善卿)이며, 조부는 광주 노씨 영천 입향조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용양위 사직(龍驤衛司直) 노탁(盧琢)이다. 아버지는 충순위(忠順衛) 노응세(盧應世)이다. 어머니 양성 이씨(陽城李氏)로 사인(士人) 이의보(李義輔)의 딸이다.
부인은 의인(宜人)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교수(敎授) 조빈(曺璸)의 딸로 후사(後嗣)가 없어 막내 아우 노준(盧遵)의 아들 노기종(盧起宗)으로 후사를 이었다. 사위는 정랑(正郞) 최겸(崔謙)이다.
[활동 사항]
노수는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예(文藝)가 빨리 진취함에 스승의 명으로 삼족당 기문을 지으니 당세에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553년(명종 8)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나아가 배워 성리학의 참된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기로 하고 후학을 양성을 자기 책임으로 삼았다.
명산(明山) 김응생(金應生), 노촌(魯村) 정윤량(鄭允良) 등과 자양 서당(紫陽書堂)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고, 나아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옛 집터에 임고 서원(臨皐書院)을 세웠는데, 완공에 이르러 퇴계 이황에게 글을 청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또한 서울에 가서 널리 서적을 구하여 갈무리하고자 하니 퇴계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전에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성리군서(性理羣書)』 1질로써 그 후면에 연유를 기록하여 내주었다. 노수는 임고 서원의 규범과 절목을 한결같이 스승의 지명(指命)에 따랐다.
고을 군수인 심의검(沈義儉)이 감히 영천 향교 대성전(大成殿) 앞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 재료로 삼는 일이 생기니, 노수가 향유(鄕儒)를 이끌고 글을 지어 문묘(文廟)에 아뢰기를, “아! 공자님이시여! 또 다시 벌수(伐樹)를 만났습니다. 그려!”라고 하였더니, 심 군수가 감사에게 거짓 보고를 조정에 아뢰니 전가사변(全家徙邊)의 법에 해당시켰는데, 대사헌(大司憲) 추파(秋坡) 송기수(宋麒壽)가 경연(經筵)에서 3차례나 상주하여 면할 수 있었다.
노수는 뜻이 높고 행실이 깨끗해서 신망이 당대에 두터웠고, 마을에 향약(鄕約)을 이루어 인륜을 소중히 여기는 풍속이 생기도록 했으며, 만년에 강정(江亭)을 지어 강마하고 임천을 한가로이 즐기다가 1584년 9월 19일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석판본인 2권 1책의 『소암유고(小庵遺稿)』가 있다.
[묘소]
노수의 묘소는 군 남쪽 오봉곡에 썼으나, 임진왜란으로 실전하고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나현(蘿峴) 참봉공묘(參奉公墓) 동쪽에 단(壇)을 만들고 비를 세워 매년 제례를 올리고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직천리에 강정(江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