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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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萬陽 |
이칭/별칭 | 경순(景醇),훈수(塤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664년 10월 13일 - 정만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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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30년 7월 1일 - 정만양 사망 |
출생지 | 정만양 - 경상북도 안동시 천전리 |
외가|처가 | 정만양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
묘소|단소 | 정만양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
사당|배향지 | 횡계서당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457-3 |
사당|배향지 | 모고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457-3 |
사당|배향지 | 옥간정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영일 |
저술 | 『훈지양선생문집(壎篪兩先生文集)』 외 다수 |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문인.
[개설]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려 시대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가계]
정만양(鄭萬陽)의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叟)이고, 1664년(현종 5) 10월 13일 안동(安東) 천전리(川前里)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1730년(영조 6) 7월 1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정안번(鄭安藩)이며, 증조는 부사(府使) 정호인(鄭好仁), 조부는 정시행(鄭時行)이다. 부친은 진사(進士) 정석주(鄭碩冑)이며, 모친은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생원(生員) 김방열(金邦烈)의 딸이다.
정만양의 첫째부인은 진사(進士) 이지욱(李之煜)의 딸로 1남 3녀를 두었고, 둘째부인은 조문하(曺文夏)의 딸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정일기(鄭一夔)·정일연(鄭一燕)이며, 사위는 박평(朴枰)·권분(權賁)·안경원(安慶遠)·조지경(趙之經)이다.
[활동 사항]
정만양은 처음에는 종조부 정시연(鄭時衍)에게 수학하여 문리를 밝게 통달하였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우 정규양(鄭葵陽)과 더불어 보현산 아래 횡계(橫溪)로 들어가 깊은 학문을 닦아 경사(經史)에서부터 성리학(性理學)·예학·천문·지리·역학·경제·정치·율려(律呂)·과제(科制) 등에 이르기까지 두루 정통하였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
퇴계학에 몰두하면서 윤증(尹拯)·정제두(鄭齊斗)·정시한(丁時翰)·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에 관한 토론과 서신 왕래가 많았으며, 학파를 초월하여 학문의 진수를 탐구하였다.
아우와 우애가 무척 깊어 저서를 낼 때도 반드시 함께 이름을 붙여 ‘훈지록고례(壎篪錄攷禮)’라 하고 자손에게도 모두 훈지(壎篪)[형과 아우를 일컬음]의 뜻을 따라 우애를 다하기를 유언하였다. 정만양은 1724년(경종 4)에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32권 16책의 『훈지양선생문집(壎篪兩先生文集)』과 6권 3책의 속집(續集)이 있다. 『곤지록(困知錄)』의 내외편, 『가례차의(家禮箚疑)』와 『개장비요(改葬備要)』, 『상지록(尙知錄)』, 『모현록(慕賢錄)』, 『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 『이기집설(理氣輯說)』, 『계몽해의(啓蒙解疑)』, 『의례편고(疑禮便攷)』, 『치도의설(治道擬說)』, 『산거일기(山居日記)』 등의 저술이 있다.
[묘소]
정만양의 묘소는 영천시 북안면(北安面) 원당리(元堂里)에 있으며, 광릉(廣陵) 이만운(李萬運)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영천시 화북면(花北面) 횡계리(橫溪里)에 옥간정(玉磵亭)과 모고헌(慕古軒), 횡계서당(橫溪書堂)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