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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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萬-示-眞- |
이칭/별칭 | 회응(會應),삼성재(三省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639년 3월 5일 - 손만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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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76년 - 손만진 별시 무과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699년 11월 26일 - 손만진 사망 |
수학지 | 삼성정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상리리 |
묘소|단소 | 손만진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
성격 | 무인 |
성별 | 남 |
본관 | 밀양 |
[정의]
조선 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무인.
[가계]
손만진(孫萬 示+眞)의 본관은 밀양. 자는 회응(會應), 호는 삼성재(三省齋)이며, 1639년(인조 17) 3월 5일에 태어나 1699년(숙종 25) 11월 26일 사망하였다. 고조는 참봉(參奉) 손주(孫冑)이며, 증조는 참의(參議)에 추증된 손덕침(孫德沈), 조부는 조산대부(朝散大夫) 손상운(孫祥雲),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손봉후(孫奉後), 어머니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정사물(鄭四勿)의 딸이다. 부인 중화 양씨(中和楊氏)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양경연(楊景淵)의 딸로서, 슬하에 2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손한표(孫漢杓)와 손한석(孫漢碩)이다.
[활동 사항]
손만진은 어려서부터 두 형과 함께 책상을 맞대고 학문을 익혔고, 성품 또한 효성스러우며, 우애가 지극하였다. 1676년(숙종 2) 별시(別試)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에 발탁되었으나 곧 물러났다. 안개와 구름이 서린 수석(水石) 사이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삼성(三省)’이라 편액을 걸고 심성을 닦으며 종신토록 소요하였다.
1685년(숙종 11) 어머니 상을 당함에 아버지 때처럼 염습과 장례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따랐다. 또한 항상 자제들을 훈회(訓誨)함에 “학문을 함에는 당연히 효제로써 근본을 삼고, 문예(文藝)는 지엽(枝葉)으로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손만진은 일생 모든 행동을 마음에 두고 본분에 의거하여 실행하였으며, 한 치 어긋남이 없으니 향당(鄕黨)에서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다.
[묘소]
손만진의 묘소는 영천시 고경면(古鏡面) 파계리(巴溪里) 단곡(單谷)에 있으며, 연안(延安) 이세녕(李世寧)이 지은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영천시 고경면(古鏡面) 상리리(上梨里)에 평소 학문을 닦던 삼성정(三省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