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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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重器 |
이칭/별칭 | 도옹(道翁),매산(梅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순홍 |
출생 시기/일시 | 1685년 2월 22일 - 정중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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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15년 - 정중기 사마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28년 - 정중기 승무원 정자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731년 - 정중기 정자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732년 - 정중기 춘추관 기주관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741년 - 정중기 병조 좌랑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756년 - 정중기 형조 참의에 임명됨 |
몰년 시기/일시 | 1757년 7월 8일 - 정중기 사망 |
묘소|단소 | 정중기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신방리 |
사당|배향지 | 산수정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매곡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영일 |
저술 | 『매산집(梅山集)』|『가례집요(家禮輯要)』|『주서절요집해(朱書節要集解)』 |
[정의]
조선 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정중기(鄭重器)의 본관은 영일. 자는 도옹(道翁), 호는 매산(梅山)이며, 1685년(숙종 11) 2월 22일에 태어나 1757년(영조 33) 7월 8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증(贈) 호조 정랑(戶曹正郞) 정의번(鄭宜藩), 증조부 해남 현감(海南縣監) 정호례(鄭好禮), 조부는 전주 영장(全州營將) 정시심(鄭時諶)이다. 아버지는 정석달(鄭碩達)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 權氏)로 권숙(權塾)의 딸이다.
부인은 문소 김씨(聞韶金氏)로 통덕랑(通德郞) 김방겸(金邦謙)의 딸이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니 아들은 정일감(鄭一鑑)과 정일찬(鄭一鑽)이며, 사위는 신황(申熿)이다.
[활동 사항]
정중기는 이현일(李玄逸)과 정만양(鄭萬陽)·정규양(鄭葵陽)의 문하에 종유하였다. 1715년(숙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영조 4)에 승문원 정자(承文院副正字), 1731년에 정자(正字), 1732년에 저작(著作)에 전보되어 박사(博士)를 거쳐 봉상 직장(奉常直長)이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승급되어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겨 호남 부사(湖南副使) 겸 해운 판관(海運判官)에 제수되고, 그 다음해는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제수되었다.
1741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 1742년에 결성 현감(結城縣監)에 제수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파직되어 돌아왔다. 1751년 관북 부사(關北副使)에 제수되고, 이듬해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겨울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되었다.
1753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고 정언(正言), 이랑(吏郞)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56년(영조 32)에 통정(通政)으로 승급되어 상예원 판결사(常隸院判決事)에 배수되어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의 12권 6책의 『매산집(梅山集)』과 7권 3책의 『가례집요(家禮輯要)』, 『주서절요집해(朱書節要集解)』 등이 있다.
[묘소]
정중기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신방리(新坊里) 곡내(谷內)에 있으며, 유치명(柳致明)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매곡리에 만년에 지은 산수정(山水亭)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