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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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好仁 |
이칭/별칭 | 자견(子見),양계(暘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순홍 |
출생 시기/일시 | 1597년 8월 19일 - 정호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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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8년 - 정호인 진사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정호인 문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35년 - 정호인 사헌부 감찰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37년 - 정호인 형조 좌랑, 예조 좌랑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39년 - 정호인 양산 군수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47년 - 정호인 형조와 예조 정랑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정호인 진주 목사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654년 - 정호인 남원 부사에 임명됨 |
몰년 시기/일시 | 1655년 7월 11일 - 정호인 사망 |
수학지 | 양계정사 -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
묘소|단소 | 정호인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룡동 |
사당|배향지 |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청호서원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영일 |
저술 | 『양계집(暘溪集)』 |
[정의]
조선 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정호인의 본관은 영일. 자는 자견(子見), 호는 양계(暘溪)이며, 1597년(선조 30) 8월 19일에 태어나 1655년(효종 6) 7월 11일에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정차근(鄭次謹)이고, 증조는 창릉 참봉(昌陵參奉) 정윤량(鄭允良)이며, 조부는 병조 판서에 추증되고 강의(剛義)라는 시호를 받은 정세아(鄭世雅)이다. 아버지는 어모 장군(禦侮將軍)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 정안번(鄭安藩)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된 권극립(權克立)의 딸이다.
부인은 월성 손씨(月城孫氏)[경주 손씨] 손로(孫魯)의 딸로, 슬하에 3남 2녀를 두니 아들은 정시행(鄭時行)·정시연(鄭時衍)·정시간(鄭時衎)이며, 사위는 밀양인(密陽人) 박율(朴慄)과 창녕인(昌寧人) 조효량(曺效良)이다.
[활동 사항]
정호인은 문예가 뛰어나고 재주와 명망이 성대하여, 어렸을 때 손처눌(孫處訥)에게 수학했고, 성장하여서는 또한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문장과 재행(才行)이 세상의 추존함이 되었다.
1616년(광해군 8)에 진사에 뽑혔으며, 1627년(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 1635년에 박사(博士)에 오르고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으며, 1636년에 난리가 일어나자 행재소에 나아가지 못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을 도왔다.
이듬해인 1637년 전적(典籍)을 제수 받고, 다시 형조 좌랑(刑曹佐郞),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치고 이듬해는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1639년에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나아가 마을을 부흥시키고 폐단을 바로잡았다.
1647년에 형조(刑曹)와 예조(禮曹) 정랑(正郞)을 제수 받고, 1648년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이어 진주 목사(晋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1650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1654년(효종 5)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로 부임하는 등 여러 차례 고을살이를 맡아 모든 곳에 송덕비[유애비(遺愛碑)]가 있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2권 1책의 『양계집(暘溪集)』이 있다.
[묘소]
정호인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룡동 서파(西坡)에 있으며, 장응일(張應一)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대구광역시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서 제향하며,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에 정호인이 강학과 소요를 위해 지은 정자인 양계정사(暘溪精舍)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