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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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繼商 |
이칭/별칭 | 종성(宗聖),충정(忠貞)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순홍 |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문인.
[가계]
조계상의 본관은 창녕. 자는 종성(宗聖)이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창녕 조씨 조계상(曺繼商)의 고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좌익병마사(左翼兵馬使) 판희천군사(判熙川郡事) 조신충(曺信忠)이니 영천 입향조이다. 조계상의 증조는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 조상치(曺尙治), 조부는 예조참의(禮曹參議) 조변융(曺變隆)이다. 조계상의 아버지는 영흥부판관(永興府判官) 조구서(曺九敍)이며,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영천 이씨(永川 李氏)로 판서(判書) 이승손(李承孫)의 딸이다.
조계상은 1466년(세조 12) 7월 24일에 태어났고,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덕수 이씨(德水 李氏)로 사간(司諫) 이의무(李宜茂)의 딸이다. 슬하에 3남 4녀를 두니 아들은 창양군(昌陽君) 조광원(曺光遠)과 부사(府使) 조명원(曺明遠), 첨지(僉知) 조휘원(曺輝遠)이다. 사위는 부사(府使) 황순경(黃舜卿)과 부사(府使) 한승권(韓承權), 현령(縣令) 권덕유(權德裕), 생원(生員) 이계백(李繼伯)이다.
[활동 사항]
조계상은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 원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12위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를 지냈다. 1502년에 부교리가 되었으나, 연산군의 처족인 신승복(愼承福)의 경주부윤 임명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졌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동지춘추관사로 『연산군일기』의 편찬에 참여했다. 1508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1512년(중종 7)에는 명나라가 제주도 표류민을 돌려보낸 일로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으며,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복위가 문제되자, 복위에 찬성하고 별도로 사당이라도 세울 것을 주장했다.
1519년(중종 14) 사림파가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하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사림파를 제거한 뒤 다시 등용되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1531년(중종 28)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받아 임천으로 귀양갔고, 이듬해는 홍원으로 옮겨졌다. 1537년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하려다 사사(賜死)된 뒤 우찬성(右贊成)으로 기용되었고, 뒤에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 매송면(梅松面) 야목리(野牧里) 현천(玄川) 간좌(艮坐)이며, 대제학(大提學) 성세창(成世昌)의 갈문(碣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