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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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浣 |
이칭/별칭 | 언수(彦粹),사성당(思誠堂),해동소무(海東蘇武)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546년 3월 4일 - 김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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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77년 - 김완 무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김완 전라좌수영 소속 사도첨사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완 옥포해전, 당포해전,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에서 활약함 |
활동 시기/일시 | 1595년 - 김완 한산도 조방장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김완 거제도 복병도장에 임명됨 |
몰년 시기/일시 | 1607년 11월 10일 - 김완 사망 |
묘소|단소 | 김완 묘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 |
사당|배향지 | 동린각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
성격 | 무인 |
성별 | 남 |
본관 | 경주 |
저술 | 『해소실기(海蘇實記)』 |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무인.
[개설]
경주 김씨는 김알지(金閼智)를 시조로 하고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을 1세조(世祖)로 하고 있다. 김완(金浣)은 경주 김씨 18세(世) 김을초(金乙軺)를 파조(派祖)로 하는 규정공파(糾正公派)의 후손이며, 김을초의 장남 호연당(浩然堂) 김자양(金自養)은 김완의 5대조로 영천 입향조이다.
[가계]
김완의 고조는 청풍부사(淸風府使) 김계돈(金季敦)이며, 증조는 직장(直長) 김장미(金長美), 조부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영릉참봉(英陵參奉) 김준(金濬)이다. 부친은 진사(進士) 김응생(金應生)이며,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오천 정씨(烏川鄭氏)로 정중호(鄭仲護)의 딸이다.
김완의 자는 언수(彦粹), 호는 사성당(思誠堂), 사호(賜號)는 해동소무(海東蘇武)이며, 1546년(명종 원년) 3월 4일에 태어나 1607년(선조 40) 11월 10일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밀양 손씨(密陽孫氏)로 손억(孫億)의 딸이며, 슬하에 3남을 두니 절충장군(折衝將軍) 중추부사(中樞府使) 김계남(金繼男)과 김우남(金佑男)·김응남(金膺男)이다.
[활동 사항]
김완은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하고, 1589년에 전라좌수영 소속 사도첨사(蛇島僉使)가 되어 힘을 다해 진지를 구축하니 관찰사의 장계로 품계가 승진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 해전과 당포 해전에서 우척후장(右斥候將),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에서는 척후장으로 활약하였다.
후일 대병장(代兵將)으로도 활약하며 이순신이 참전한 주요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자 권준과 같은 장수들이 사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을 보좌하였다.
1595년(선조 28)에 소금과 군량미로 비축한 미숫가루가 500석에 이르러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장계로 한산도(閑山島)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되었다.
1597년(선조 30)에 겸직으로 거제도 복병도장(伏兵都將)이 되어 도장포(道莊浦)와 다대포(多大浦)의 적을 격파하고 풍신수길(豊臣秀吉)과 맺은 삼혈맹장 등을 획득하여? 통제사 원균(元均)에게 바쳤다.
그해 7월 부산 앞바다에서 적에게 크게 패퇴하고,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선에 실리는 몸이 되어 안골포에 있는 왜적의 본부로 압송되었다가 왜국으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1598년 1월 깊은 밤에 탈출을 감행하여 석 달이 지난 4월 18일 다대포에 이르렀으며, 다음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여 그리던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4월 29일 양산에 도착하여 군수 박응창이 전후 사실을 급히 보고하니 순찰사가 그 동안의 곡절과 적의 형세를 묻고는 공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경위를 상세하고 적고, 또한 왜국 및 부산과 동래 지역 적의 형세를 자세하게 기록하여 왕에게 장계를 올렸다.
선조는 크게 감탄을 하며 칭찬을 하고는 동방의 소무라는 뜻으로 ‘해동소무(海東蘇武)’라 사호하고, 함안 군수의 벼슬을 내려 그 충성과 용맹을 표창하였다. 김완은 함안군수로 부임한 뒤에도 전쟁으로 부상한 군사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여 완전히 활력을 되찾게 하였으며, 사방의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니 칭송이 널리 퍼졌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3권 1책의 『해소실기(海蘇實記)』가 있다.
[묘소]
김완의 묘소는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노항리(魯巷里) 연곡(軟谷)에 있으며, 진성(眞城) 이만규(李晩煃)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김완은 1606년(선조 39) 선무원종공신에 이름이 올랐다. 고향 영천시 자양면(紫陽面) 노항리(魯巷里)에 해동의 기린각이란 의미로 동린각(東麟閣)을 세워 김완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영정을 봉안하여 향사를 지냈다. 그러나 영천댐 건설로 인해 동린각을 임고면(臨皐面) 삼매리(三梅里) 자호천(紫湖川) 언덕 위로 옮겨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