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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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方山烽燧址 |
이칭/별칭 | 영계산 봉수(永界山烽燧),영계방산 봉수(永溪方山烽燧)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임포리 산19-1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철영 |
건립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방산 봉수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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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894년 - 방산 봉수 폐지 |
소재지 | 방산 봉수 터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임포리 산19-1 일대 |
성격 | 봉수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임포리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 터.
[개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 변경의 군사정보를 정해진 신호체계에 따라 중앙과 주변지역에 전하던 통신방법이었다. 봉수제는 고대 삼국 시대부터 원시적으로 활용되었으나 정례화한 것은 고려 시대였다. 이후 조선 세종대에 크게 정비되어 1894년까지 국가적인 운영을 하였다.
조선 시대 봉수제는 노선 상으로 기간 봉수인 직봉(直烽)과 보조 봉수인 간봉(間烽)으로 구별하거나, 봉수대의 설치 지역과 기능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나눈다.
경봉수는 조선 시대 전국의 봉수가 집결하였던 봉수로 서울 남산의 목멱산봉수를 이르며, 연변봉수는 지방의 해안 및 변경지역의 최 일선에 설치되었던 봉수였다. 내지봉수는 내륙 각지에 설치되어 서울의 경봉수와 변경의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던 중간봉수로 조선 시대에는 주로 복리봉수(腹裏烽燧)로 불렀다.
방산 봉수는 봉수노선과 성격상 부산 다대포진 응봉봉수(鷹峰烽燧)에서 초기(初起)하여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봉수로 전달되던 제2로 직봉노선의 내지봉수이다. 조선 전시기에 걸쳐 대응봉수와 노선의 변동 없이 일관성을 유지했는데, 남동쪽 경주시 서면 아화리 소재의 주사봉수(朱砂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서쪽 영천시 쌍계동의 성황당 봉수(城隍堂烽燧)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변천]
방산 봉수는 조선 전기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 전시기의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초축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봉수 명칭은 대다수 지지서에 방산 봉수로 기록되어 있으나 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나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는 영계산 봉수(永界山烽燧)로도 쓰였고 1864년에 편찬된 『대동지지(大東地志)』나 1908년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는 영계방산 봉수(永溪方山烽燧)로 표기하였다.
[위치]
방산 봉수(方山烽燧)는 영천시 북안면 임포리 서편의 해발 327.4m인 방산 정상에 있는데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지형상 남쪽을 제외한 3면은 급사면을 이루고 있다.
[현황]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에는 주어진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기본시설이 갖추어졌다. 먼저 평화 시의 1거는 물론이고 비상시의 5거를 올리기 위해 불이나 연기를 피웠던 거화시설인 연조(煙竈)를 필수적으로 구비하였다. 연조는 봉조(烽竈)·봉돈(烽墩)·연굴(煙窟)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또한 연조 주위에는 맹수나 들짐승 등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고, 거화(炬火)시 실수로 불이 산 아래로 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호벽을 둘렀다. 물론 방호벽에는 봉수군이 봉수 내부로 드나들기 위한 출입시설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거화재료와 각종 비품 등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고사(庫舍)]나 봉수군의 거주용 건물을 축조하였다.
현재 방산 봉수는 훼손이 심하여 봉수대 관련 유구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봉수대 터에는 2000년 1월 1일 ‘온양 방씨 자연보호회’에서 설치한 표지석 1기와 산불 감시초소가 있다.
[의의와 평가]
방산 봉수는 조선 전기에 축조되어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제도 철폐 시까지 운영하였던 제2로 직봉노선의 내지봉수였다. 그러나 봉수제 폐지 후 봉수대를 구성하였던 대부분의 시설이 멸실되어 현재 그 터만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