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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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所山烽燧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철영 |
건립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소산 봉수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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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 시기/일시 | 1894년 - 소산 봉수 폐지 |
소재지 | 소산 봉수 터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무학산 일대 |
성격 | 봉수 |
지정 면적 | 전체 둘레 102.5m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무학산 일대에 있는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 터.
[개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 변경의 군사정보를 정해진 신호체계에 따라 중앙과 주변지역에 전하던 통신방법이었다. 봉수제는 삼국 시대부터 원시적으로 활용되었으나 정례화한 것은 고려 시대였다. 이후 조선 세종대에 크게 정비되어 1894년까지 국가적인 운영을 하였다.
조선 시대 봉수제는 노선 상으로 기간 봉수인 직봉(直烽)과 보조 봉수인 간봉(間烽)으로 구별하거나, 봉수대의 설치 지역과 기능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나눈다. 경봉수는 조선 시대 전국의 봉수가 집결하였던 봉수로 서울 남산의 목멱산 봉수를 이르며, 연변봉수는 지방의 해안 및 변경지역의 최 일선에 설치되었던 봉수였다. 내지봉수는 내륙 각지에 설치되어 서울의 경봉수와 변경의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던 중간봉수로 조선 시대에는 주로 복리봉수(腹裏烽燧)로 불렀다.
소산 봉수(所山烽燧)는 봉수노선과 성격상 동래 간비오 봉수(干飛烏烽燧)에서 초기(初起)하여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포항 뇌성산 봉수(磊城山烽燧)에서 분기한 후 안강 지역을 거쳐 영천 성황당 봉수로 합해지던 제2로 간봉[1] 노선의 내지봉수이다.
[변천]
소산 봉수는 조선 전기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 전시기의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초축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봉수 명칭은 대다수 지지서에 소산 봉수(所山烽燧)로 기록되어 있으며 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나 1895년에 편찬된 『영남읍지』 등에 ‘所’자를 ‘蘇’자로 표기하여 한자음의 변화는 있지만 조선 전시기를 통해 변동 없이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위치]
소산 봉수(所山烽燧)는 영천시 고경면 파계리 고경저수지 서편의 해발 440m인 무학산의 부속 봉우리에 있는데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현황]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에는 통상적으로 연조(煙竈), 방호벽, 봉수군 주거, 고사(庫舍) 등 봉수군이 주어진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시설이 갖추어졌다. 현재 고경면 파계리 고경저수지 서편의 해발 440m인 무학산의 부속 봉우리에 있는 소산 봉수는 영천 지역의 봉수 중 유지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현재 봉수대 내부시설은 그동안의 훼손으로 지표상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석축 방호벽과 출입시설은 잘 남아있다. 방호벽을 통해 본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북서-남동을 장축으로 하는 타원형이다. 봉수대의 규모는 장축 36.5m, 단축 22.5m, 전체 둘레 102.5m 정도로 내지봉수로서는 대형이다. 출입구는 개방식 형태로 남동쪽 방호벽을 폭 2.4m가량 절개하여 1개소 시설하였고, 전면으로 3~4단의 석축계단 흔적이 확인된다.
방호벽은 북서편과 남동편 출입구 부분이 가장 잘 남아있으나 봉수대 운영 당시에는 4면을 모두 석축으로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호벽의 잔존 높이는 외벽부가 약 1.5~2.7m, 내벽부가 약 0.8m이며 잔존 폭은 2.0~4.0m 정도이다. 방호벽의 구조는 하부의 경우 자연 능선을 깎아낸 후 외측만을 할석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아올리고 내부에는 부정형의 작은 석재들을 채워 넣은 내탁(內托)방식이다. 방호벽 상부는 안팎으로 석재를 사용하여 협축(夾築)방식으로 축조하였다. 내부시설은 1기의 민묘가 조성되면서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남동쪽 출입구 가까이에 지름 3.5m의 연조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소산 봉수는 조선 전기에 축조되어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제도 철폐 시까지 운영되었던 제2로 간봉[1] 노선의 내지봉수였다. 조선 전시기에 걸쳐 대응봉수와 노선의 변동 없이 일관성을 유지했는데, 동쪽 경주시 안강읍 소재의 형산 봉수(兄山烽燧)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서쪽 영천시 쌍계동의 성황당 봉수(城隍堂烽燧)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영천 지역의 봉수 중 유구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으로 방호벽, 출입구, 연조 등이 확인되며, 규모면에서도 큰 대형봉수이다. 우리나라의 내지봉수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