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892 |
---|---|
한자 | 城隍堂烽燧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 산32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철영 |
건립 시기/일시 | 조선 전기 - 성황당 봉수 건립 |
---|---|
폐지 시기/일시 | 1894년 - 성황당 봉수 폐지 |
소재지 | 성황당 봉수 터 - 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 산32 일대 |
소재지 | 성황당 봉수 터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원제리 |
성격 | 봉수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쌍계동 봉화산 정상에 있는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 터.
[개설]
봉수는 봉(烽)[횃불]과 수(燧)[연기]로 변경의 군사정보를 정해진 신호체계에 따라 중앙과 주변지역에 전하던 통신방법이었다. 봉수제는 삼국 시대부터 원시적으로 활용되었으나 정례화한 것은 고려 시대였다. 이후 조선 세종 대에 크게 정비되어 1894년까지 국가적으로 운영되었다.
조선 시대 봉수제는 노선 상으로 기간 봉수인 직봉(直烽)과 보조 봉수인 간봉(間烽)으로 구별하거나, 봉수대의 설치 지역과 기능에 따라 경봉수(京烽燧)·내지봉수(內地烽燧)·연변봉수(沿邊烽燧)로 나눈다. 경봉수는 조선 시대 전국의 봉수가 집결하였던 봉수로 서울 남산의 목멱산봉수를 이르며, 연변봉수는 지방의 해안 및 변경지역의 최 일선에 설치되었던 봉수였다. 내지봉수는 내륙 각지에 설치되어 서울의 경봉수와 변경의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던 중간봉수로 조선 시대에는 주로 복리봉수(腹裏烽燧)로 불렀다.
성황당 봉수(城隍堂烽燧)는 봉수노선과 성격상 부산 다대포진 응봉봉수(鷹峰烽燧)에서 초기(初起)하여 서울 목멱산(木覓山)봉수로 전달되던 제2로 직봉노선의 내지봉수이다.
[변천]
성황당 봉수는 조선 전기 편찬된 1425년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부터 전시기의 각종 지지서(地誌書)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설치된 시기는 조선 전기이고,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제도가 철폐되면서 폐지되었다. 봉수 명칭은 조선 전시기를 통하여 변동 없이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위치]
성황당 봉수는 현재 구봉(舊烽)과 신봉(新烽) 두 곳에 봉수대 터가 남아있다. 구봉은 영천시 쌍계동 서편의 해발 276m인 봉화산[산 32번지] 정상에 있는데 영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고의 관망지이다. 신봉은 구봉에서 남쪽으로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580m가량 떨어진 원제리 소재의 산 정상에 있다. 언제 구봉을 폐지하고 신봉으로 봉수대를 옮겼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성황당 봉수와 대응하는 4개소의 봉수가 더 잘 보이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 이설(移設)한 것으로 생각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성황당 봉수 터는 정식으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천향토사연구회와 경상북도 문화재연구원에서 두 차례 주변 지표답사를 통해 봉우리 주변에서 많은 기와편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기와를 이용한 건축물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조선 시대 내지봉수대에는 통상적으로 연조(煙竈)·방호벽·봉수군 주거·고사(庫舍) 등 봉수군이 주어진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시설이 갖추어졌다. 현재 쌍계동 봉화산 정상에 있는 성황당 봉수의 구봉(舊烽)은 그동안 진행된 훼손으로 인하여 봉수대 관련 유구가 대부분 멸실되고 일부 흔적만 확인된다. 이곳에서는 최근 몇 년 동안 해맞이 신년행사가 열렸으며,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설치한 표지석 1기와 산불 감시초소가 있다.
신봉(新烽)은 산 정상부에 봉수대 유구가 남아있다. 산 정상부의 타원형 평지에는 봉수대로 추정되는 높이 1~1.5m 가량의 토석혼축(土石混築) 기단부가 조성되어 있다. 이 기단부의 평면 또한 지형과 동일한 타원형이며 단축은 12.7m이고 장축은 14.9m이다. 타원형 평지의 전체 둘레는 89m이며 기단부의 전체 둘레는 57m이다. 현재 지표상에서는 연조나 방호벽, 건물지, 출입시설 등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99년 5월 20일 영천향토사연구회와 금호읍 청년회에서 설치한 표지석 1기가 설치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성황당 봉수는 조선 전기에 축조되어 1894년(고종 31) 전국 봉수제도 철폐 시까지 운영되었던 제2로 직봉노선의 내지봉수였다. 영천군의 읍치(邑治)와 불과 3㎞ 정도의 거리에 있어 영천 지역 봉수대 중에서도 그 역할과 비중이 가장 컸던 봉수였다. 봉수 노선상에 있어 성황당 봉수는 동·남해안에서 북상하는 2개의 간봉(間烽)이 합류하던 일종의 결절점(結節點)이자 요충지였다. 즉, 동래 간비오 봉수(干飛烏烽燧)에서 초기(初起)하는 제2로 간봉[1] 노선이 포항 뇌성산 봉수(磊城山烽燧)를 경유하여 이곳에서 합해지며, 가덕도 천성보 봉수(天城堡烽燧)에서 시작하는 제2로 간봉[8] 노선이 김해·청도·대구·경산 지역을 거쳐 성황당 봉수에서 합류하였다.
따라서 성황당 봉수는 남동쪽으로는 북안면 임포리에 소재하는 제2로 직봉상의 방산 봉수(方山烽燧)와, 동쪽으로는 고경면 파계리에 있는 제2로 간봉[1] 노선상의 소산 봉수(所山烽燧)와, 남서쪽으로는 경산시 하양읍에 있는 제2로 간봉[8] 노선상의 시산 봉수(匙山烽燧)와 응하여 이들 봉수에서 보내는 신호를 받아 북서쪽 청통면 신덕리의 성산 봉수(城山烽燧)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대응봉수와 노선은 조선 후기까지 큰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현재 구봉(舊烽)과 신봉(新烽) 두 곳에 봉수대 터가 남아있는데, 특히 신봉 기단부의 평면이 타원형이라는 게 특징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봉수는 울산의 부로산 봉수[제2로 직봉]와 고양 독산봉수[제3로 직봉], 논산 황화대 봉수[제5로 직봉] 등 소수의 직봉 노선 봉수에서만 확인되는 드문 사례이다. 따라서 성황당 봉수 신봉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내지봉수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