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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884
한자 城廓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이철영
[상세정보]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있는, 흙이나 돌 따위로 높이 쌓아 만든 군사적인 방어 시설물.

[개설]

성(城)의 사전적 의미는 ‘적을 막기 위하여 높이 쌓은 담’이며, 한자의 자의(字義)는 흙[土]으로 마련한[成] 시설물임을 뜻한다. 또한 성곽(城郭)이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전부 일컫는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내성과 외성을 구분하여 축조하거나 뚜렷이 구분하지 않았다.

성(城)의 기원은 현재까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자료를 참고할 때 울주 검단리 유적과 천상리 유적에서 확인되는 환호(環濠)[외부의 짐승과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집단 거주지 둘레에 판 좁고 긴 도랑]나 부여 송국리 유적의 목책(木柵) 등으로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까지 소급된다.

문헌상으로 가장 앞선 성곽은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에 나타나는 왕검성(王儉城)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기원전 2세기에 왕검성이란 성곽이 존재했었고, 막강한 한(漢)나라의 침입을 맞아 1년여에 걸쳐 장기간 전투를 전개했던 견고한 성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성곽들은 중국의 네모난 성곽과 달리 지형의 특성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었으며 곧 산성으로 발전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후에는 삼한 및 삼국 시대를 거치며 큰 강을 낀 평지에 거주하면서 거주지 주변에 토성을 쌓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기원 후 4, 5세기 이후 고대 왕권이 확립되면서 왕이 거주하는 도성(都城)을 중심으로 더욱 발달된 성곽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 도성에 내외에 이중의 성곽을 쌓고, 도성 주변에는 입보용(入保用) 산성을 갖추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수도 개경(開京)은 도시 외곽에 나성(羅城)을 쌓고 다시 안에 왕성(王城)을 갖추어 이중의 성곽으로 조성하였으며,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축조하였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탈이 심해지자, 연해안에 읍성(邑城) 축조를 강화하고 산성에 대한 개축과 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평상시의 읍성과 유사시의 산성을 두는 방어 개념은 그대로 조선 왕조로 이어져 많은 성곽이 지속적으로 개축·수리되거나 새롭게 축조되었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고대에서 조선조에 이르는 오랜 시기를 통해 축조된 시설이어서 그 형태나 구조가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성곽의 유형은 축성 시기나, 축성 목적, 축성 지형, 축성 재료 등 여러 가지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다.

먼저 축성 목적에 따라 한 나라의 수도 서울에 마련된 성곽을 도성(都城)이라 하며,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거주하는 공간을 성벽으로 돌린 것을 궁성(宮城), 지방의 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의 행정 관서가 마련된 고을에 유사시 외적을 대비함과 동시에 행정적인 편의를 위해 마련한 성곽을 읍성(邑城)이라 한다. 또한 평시 방어에 유리한 인근 산지에 성곽을 마련하여 둔 다음 유사시에 입보(入保)하여 농성하는 성곽을 대피성(待避城)이라 하고, 국경 요충 지역에 하나의 축선으로 길게 쌓은 것은 장성(長城) 혹은 행성(行城)이라 하며, 세곡(稅穀) 등 나라의 중요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창성(倉城), 군사상 육수군의 주요 거점 지역에 설치한 영진성(營鎭城), 국경이나 해안에 설치한 작은 요새인 보루성(堡壘城),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마필을 생산하기 위해 쌓은 목장성(牧場城), 임진왜란 시 일본군이 그들의 근거지 확보를 위해 남해안 일대에 축조한 왜성(倭城)으로 구분한다. 이외에도 일반적으로 성곽은 축성 재료와 축성 지형, 중복도, 성곽 형태 등에 따라 분류한다.

[내용]

영천은 삼국 시대부터 신라의 왕경 경주로부터 북방의 최일선에 이르는 경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였던 관계로 많은 성곽이 경영되었다.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영남대로(嶺南大路)에 포함되어 국방상의 중요성은 지속되었다. 영천 지역에 현존하는 성곽들은 잔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우리나라의 성곽 축성 기법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1. 영천읍성

영천읍성(永川邑城)은 1591년(선조 24)에 축성되었지만, 이듬해 임진왜란의 전화(戰禍)를 입어 파괴되었다. 지금은 고문헌의 기록과 고지도, 현장 확인 등을 통해 성곽의 범위를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영천읍성의 추정 범위는 영천시 문내동·성내동·교촌동·창구동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남천[금호강(琴湖江)]과 절벽, 배후의 산지 등 자연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쌓은 자연 지세형 읍성으로 방형(方形)의 평산성(平山城)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까지 남아 있던 서쪽과 동쪽의 일부 잔존 성벽이나 객사(客舍)나 동헌(東軒) 등의 공해(公廨) 건물도 일제 강점기 대의 훼손과 도시 개발로 인해 대부분 없어졌다.

2. 금강산성

금강산성(金剛山城)영천시 완산동고경면 대의리에 걸쳐 있는 금강산[해발 150m]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산봉우리를 따라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금강산성은 지금까지 『삼국사기』 지증왕조의 기록에 의거하여 당시 골벌국(骨伐國)에 축성된 골화성(骨火城)으로 보기도 하며, 『영양지(永陽誌)』 성곽조의 기록을 근거로 나말 여초에 활약한 이 지역의 호족 황보능장(皇甫能長)이 축성한 성곽으로 추정한다. 현재 이 성은 대의리성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나 금강산성이란 명칭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금강산성은 돌과 흙을 섞어 만든 토석 혼축으로, 성벽 내부에는 돌과 흙을 채우고 그 밖을 흙으로 마무리하였다. 성벽의 평균 높이는 2~3m 정도이며, 토루(土壘)의 폭은 약 2~2.5m 정도이다. 금강산성의 북쪽은 자연 절벽이며, 북동 지역으로는 몇 개의 하천들이 흘러 자연적인 해자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 백암산성

지명을 따서 금대리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암산성(白巖山城)임고면 금대리 해발 240m의 고지에 입지하고 있다. 성의 축조 시기와 경영, 폐성(廢城) 시점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백암산성은 동쪽 성벽의 경우 임고천에 면한 천혜의 자연 절벽을 이용하였고, 나머지 북·서·남쪽 구간은 토석 혼축으로 축조하였다. 잔존 성벽은 보통 1~2m 정도의 높이로 남아 있으며, 그 상단의 너비는 2~3m 정도이며, 내부에 너비 3~5m 정도의 내부 회곽도(內部廻郭道)가 조성되어 있다. 지형상 산성의 북동쪽은 수직 절벽을 형성하고 바로 아래에는 임고천이 흘러 자연 해자(垓子)의 역할을 하고 있다.

4. 가상리산성

가상리산성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가래실마을의 뒷산인 해발 215m의 백학산에 위치한다. 이 성의 구체적인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가 없지만, 축조기 법이나 형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 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가상리산성은 토석 혼축으로 산정 상부를 따라 축성하였는데, 성의 북동쪽은 자연 절벽 구간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서남쪽 성벽만이 확인 가능하다. 자연 절벽 구간인 북동쪽으로는 화북천이 흘러 천연의 해자(垓子) 역할을 하고 있다. 가상리산성 성벽의 평균 높이는 3~4m이고, 상면 너비는 1.5m 정도로 좁은 편이며, 산성의 둘레는 약 1㎞로 가늘고 긴 편이어서 성 내부 면적은 협소하다.

5. 화성리성

화성리성영천시 신령면 화성리신령초등학교 왼쪽 낮은 구릉지에 있다. 이 성의 구체적인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가 없지만 축조 기법이나 형태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삼국 시대에 축성하여 조선 시대까지 사용하였다고 판단된다.

화성리성의 평면은 말안장모양을 이루며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화성리성 성벽 의 길이는 약 1㎞이며, 동벽은 석축이고 서벽은 토석 혼축으로 되어 있다. 자연 단애(斷涯)를 이루는 성의 동쪽 바로 아래에는 실개천이 흘러 자연 해자(垓子)의 역할을 하고 있다.

6. 화남리산성

화남리산성영천시 신령면 화남리 해발 559.2m의 혈암산(穴岩山)에 있다. 화남리산성의 축조 시기와 경영, 폐성(廢城) 시점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화남리산성 내에서 삼국 시대 토기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의 신라성으로 판단되며 신라의 북방 진출에 따른 교통로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7. 공산성

공산성(公山城)팔공산의 동봉과 서봉을 포함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공산성의 축조 시기와 경영, 폐성(廢城) 시점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고 구체적인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려의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각축장을 벌였던 곳이라는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 시대 이전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공산성 성지의 망루나 장대로 추정되는 동봉 주위로는 소량의 토기편과 와편, 자기편들이 확인되며 형태는 지형으로 볼 때 산정부를 포함하는 테뫼식 산성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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