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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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晩川精舍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신리리 27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경재 |
건립 시기/일시 | 17세기 중엽 - 만천 정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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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만천 정사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신리리 산28 |
성격 | 정사 |
양식 | ‘ㄱ’자형, 5량가|소로수장집|겹처마팔작집 |
정면 칸수 | 4칸 |
측면 칸수 | 3칸 |
소유자 | 성영진 |
관리자 | 성영진 |
문화재 지정 번호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신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인 성이직(成以直)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사.
[개설]
만천 정사는 조선 선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찰방을 역임한 성이직(成以直)의 유덕을 기리고 향내(鄕內)의 교육을 증진하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정사이다.
성이직의 본관은 창녕. 자는 여방(汝方), 호는 경재(敬齋)이다. 병자호란 후 성이직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그마한 재실인 경재(敬齋)를 짓고 독서와 수행에 힘썼으며, 창·문간·담장·벽 등에 명(銘)이 있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연구하는 붓·안석(安席)·지팡이에도 또한 모두 경구(警句)가 있었으니, 혼자 있을 때는 삼가며 공부하고, 고요함을 법으로 삼은 진정한 선비라고 칭송이 높았다.
[위치]
영천시 북안면 신리 마을회관에서 마을 뒷산으로 통하는 길로 우회전 한 후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산으로 오르는 비포장길이 나온다. 비포장길을 따라 100m가량 산으로 오르다 보면 조그마한 저수지가 나오는데 저수지 우측 높은 곳에 만천 정사가 있다.
정사가 자리한 곳 주변으로는 숲으로 둘러 쌓여있고 정사 앞으로는 저수지가 있어 정사가 있기 좋은 곳이라 할 수 있으나 최근 저수지 아래쪽에 공장이 들어서 정사 주변 환경이 많이 훼손되었다.
[변천]
만천 정사는 17세기 중엽에 초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0여 년 전에 블록 담장을 설치하고 기단에는 시멘트 마감을 했으며, 누마루 난간이 낡아 시멘트 난간으로 교체했다.
[형태]
만천 정사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가운데의 2칸 대청을 기준으로 좌우로 1칸 방을 각각 설치하고 좌측 방 전면으로 반칸 규모의 온돌방 1칸과 마루 1칸을 덧붙인 형태이다.
돌출된 전면 마루는 누하주가 있는 누마루 형식이며 3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설치하고 있는데 10년 전에 시멘트 난간으로 교체했다. 누마루의 출입은 주로 대청마루와 누마루를 연결하는 쪽마루를 이용하고 청방간에 설치한 사분합 들어열개문을 통해서도 가능하도록 했다.
창호는 마루와 방 사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공간 활용성과 개방감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고 대청마루 배면으로는 쌍여닫이창을 달아 두고 있다. 방의 창호는 전체적으로 쌍여닫이 띠살창호를 설치했다.
가구는 5량 가로 기둥 상부에 창방을 가로지르고 장혀와 도리를 얹고 소로수장 했으며 처마는 겹처마로 꾸몄다. 기단은 3벌대 기단 이상으로 높게 설치했는데 현재 시멘트로 마감하여 정확한 구조 양식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현황]
만천 정사는 관리인이 가까운 곳에 있어 관리가 비교적 잘 이루어지고 있다.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나 기단과 난간 부분 등 일부분에서 개변이 있었다. 또한 최근에 주변에 공장이 들어서 환경이 많이 변했고 건물 자체의 변형도 있었다.
[의의와 평가]
만천 정사는 성이직이 후학을 양성하던 것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정사로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가 『만천 정사기(晩川精舍記)』를 지었다. 만천 정사는 건축사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기보다 인물사적인 관점으로 평가되어야 하나 성이직에 관련한 문헌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