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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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銀海寺大雄殿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청통로 95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찬영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주 불전.
[개설]
은해사대웅전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주 불전인데, 1847년(헌종 13) 화재 이후에 건축한 건물이며, 지금의 현판은 ‘극락보전’으로 되어 있다. 1999년 8월 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6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은해사는 통일 신라 시대 809년(헌덕왕 1년)에 해안사(海眼寺)라는 이름으로 혜철 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했으며, 1546년(명종 1년)에 천교 화상(天敎和尙)이 지금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은해사라 하였다. 그 뒤 1563년(명종 18)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중건했으나 1847년(헌종 13) 다시 큰 화재로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고, 팔봉(八峰) 등이 주관하여 1919년 크게 넓혀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에서 919번 지방도[금송로]를 타고 븍쪽으로 600m 가량 가면 청통치안센터가 있는 청통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청통로를 타고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의 지곡마을을 거쳐 약 3㎞ 지점에 있다.
[변천]
은해사는 809년(헌덕왕 1)에 해안사라는 이름으로 혜철 국사가 지었다. 1546년(명종 1년)에 천교화상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우면서 은해사로 불렀는데, 그 뒤 여러 차례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1847년(헌종 13) 화재 이후 근대까지 대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말사 39개소, 포교당 5개소, 부속암자 8개소를 관장하고 있는 대본사로 1943년까지만 하더라도 건물이 35동 245칸에 이르러 대사찰의 위용을 자랑했다.
현재 은해사 본사 내에는 극락보전[옛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화루·심검당·설선당·종루·보화루·독성각·승당·요사채·객실·지장전·성보박물관 등 19개 건물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중 대웅전·보화루·불광의 3대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 한다.
[형태]
대웅전은 보화루 북쪽 끝 산 밑에 남행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구조는 다포계 팔작집이다. 평면 간살은 전·후면 어칸만 양 협칸보다 1척(尺)가량 넓게 잡았고, 양 측면은 등간격이다. 건물은 지대석·면석·갑석을 갖춘 가구식기단 위에 자연석초석을 놓고 듬직한 두리기둥을 세운 뒤 벽체와 창호를 달아 구체부를 구성했다.
창호는 전면에 각 칸, 후면에 어칸 및 좌협칸, 양 측면에는 각 좌협칸에 각기 설치되어 있다. 전면 각 칸 창호는 어칸만 꽃살과 솟을살이 한 세트로 구성된 4분합들문, 양 협칸은 솟을살 3분합들문이다.
창호 형식은 분합들문형식이나 안쪽에 둔테를 달아 개폐방식도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안여닫이이다. 양 협칸 및 후면의 창호는 모두 외여닫이 굽널정자살문이다. 주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다포계 공포를 꾸며 처마 및 내부가구를 받도록 했다.
공포는 외 4출목, 내 5출목으로 화려하고, 주상포외 공간포는 전·후면 각 칸에 2조씩, 양 협칸에는 각 1조씩 배열했다. 공간포 배열에서 주목할 점은 전·후면 및 양 측면의 어칸을 제외한 각 협칸의 공간포는 해당 주간의 중앙에 배열된 것이 아니라 모두 귀포쪽으로 편재해 배열했다. 즉 귀포쪽의 과대한 지붕하중을 보다 견실히 보강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제공 형태는 외단이 1-4제공까지 앙서-하부초각-상부 연봉조각형이고, 5제공은 수서-하부 연꽃조각형, 6제공은 봉두 또는 양두로 꾸몄다. 한편 내단은 1제공은 연꽃조각 2제공은 연봉, 3제공은 연밥, 4제공은 연꽃, 5제공은 연봉, 6제공은 연밥, 7제공은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조선 후기 공포의 제공에 나타난 장식화 경향을 잘 반영한 모습이다.
내부 상부가구는 건실한 2고주 7량가이다. 대량은 후불벽 내고주에서 후퇴량과 합보로 처리하였고, 대량 위에는 양 측면에서 올라온 곡선형의 충량 2개를 눌러 얹었다. 앞쪽 충량 머리는 용두로 장식했고, 등 위에는 재차 외기중도리를 짠 뒤 주두-첨차-뜬장혀를 결구시켜 종량을 받았다.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내진고주에 의지해 후불벽을 만들과 불단을 설치했다. 불단 상부에는 낙양각이 조각된 보개를 얹고 용과 운문, 극락조, 비천상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천장은 내목도리-외기중도리까지는 공포의 경사에 따라 빗반자로 처리하고, 외기중도리-종량간에는 우물반자, 내진중도리 사이에는 소란반자로 꾸몄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기를 이은 팔작집이다.
[현황]
대가람이었던 은해사는 수차례 화재로 크게 소실된 뒤, 조선 후기에서 근대에 대중창이 이루어져 현재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웅대했던 가람 구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과거 가람 배치는 사천왕문과 보화루(寶華樓), 대웅전이 동일축상에 배치되면서 좌우에 강당인 설선당(設禪堂)과 심검당(尋劍堂), 종무소(宗務所)가 중심 영역을 이룬 조선 후기 산지 중정식배치(中庭式配置)로 구성되어 있었다.
현재는 사천왕문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중층 루각이 자리하고 있고, 대웅전이 극락보전으로 바뀌기도 했다. 아울러 본사 및 산내 암자의 귀중한 성보문화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성보박물관 건립, 불교대학, 템플스테이 운영 등 다양한 불교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은해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된 뒤 1545년 현 위치로 옮겨 대가람을 이루었으나, 수차례 화재로 모두 소실되고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대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1847년 화재 이후 대중창 때 건립된 건물로 창호 및 공포, 내부가구에서 조선 후기의 화려한 장식화 경향을 추구했던 시기적 특성을 잘 반영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