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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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錫後-孫萬祉兩世孝子閣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상리리 |
집필자 | 이정자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633년 - 손석후 정려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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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700년 - 손만지 정려됨 |
건립 시기/일시 | 17세기~18세기 -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 건립 |
이전 시기/일시 | 1980년대 -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 이건 |
현 소재지 |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상리리 |
원소재지 |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 |
성격 | 비|비각 |
양식 | 초익공|겹처마|맞배지붕 |
정면 칸수 | 2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밀양 손씨 문중 |
관리자 | 밀양 손씨 문중 |
문물|보호단위 등급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상리리에 있는 손석후·손만지 부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
[개설]
손석후(孫錫後)[1613~?]와 손만지(孫萬祉)[1631~1703]는 밀양인으로 고경면 용전리 추곡마을에서 태어났다. 손석후가 일찍 죽어 후사가 없기에 형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손석후는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옷도 갈아입지 않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의원의 말에 따라 병에 좋다는 것은 다 써보고, 손가락까지 잘라 피를 드렸으나 끝내 돌아가심에 너무 슬퍼하다가 자신도 죽을 뻔 했다. 결국 식음을 전폐하여 아버지가 죽은 지 5일째 21세의 나이로 병이 나 죽었다.
손만지는 3세 때 계부에게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대부인이 상을 당하자 무려 6년간이나 지극한 정성으로 예를 다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위치]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은 영천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국도 28호선 변으로 비각 뒤로는 고경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손석후의 묘소는 고경면 초일리에 있고, 손만지의 묘소는 고경면 학리에 있다.
[변천]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은 나라에서 손석후의 효행에 대해 본보기를 삼고자 1633년에 정려되었고 손만지는 1700년에 정려되었다. 이 양세 효자각은 약 30년 전만 해도 고경면 용전리 추곡마을에 있었으나 손씨 후손들이 상리리로 이거(移居)를 해 옴에 따라 비각도 함께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건물로 일반적인 비각 형태이다. 전면에 ‘손씨부자정효지문(孫氏夫子旌孝之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비각은 원형의 초석을 놓고 원형 기둥을 세워 비각을 완성하고 내부에 효자비 2기를 나란히 배치했다. 주 상부는 창방을 건너지르고 연화문의 쇠서를 결구하고 주간에 소로를 끼워 넣은 초익공 양식이다. 벽은 사면 전체를 홍살벽으로 처리했고, 건물 전체 목부재에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아 비바람에 대비했고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었는데 처마에는 막새까지 있다.
[현황]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은 도로변 약간 높은 언덕에 비각 주위로 방형의 철제 울타리가 둘려 있어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손석후·손만지 양세 효자각은 영천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정면 2칸의 건물로 그 규모가 크다. 이는 2기의 효자비를 세우기 위함인 것으로 그 양식은 일반적인 비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최근 이건해 옴에 따라 건물의 부재 등은 모두 신부재로 교체되어 건축적 가치는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