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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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虎淵祠遺墟碑-碑閣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정자 |
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0년 - 호연사 훼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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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 시기/일시 | 구한말 - 호연사 유허비 및 비각 건립 |
현 소재지 | 호연사 유허비 및 비각 -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
성격 | 비|비각 |
양식 | 초익공|겹처마|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문물|보호단위 등급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호연사 유허지에 있는 비와 비각.
[개설]
호연사(虎淵祠)는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안증(安嶒)[1494~1553]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었다. 광주 안씨(廣州 安氏) 경상북도 영천 입향조인 안증의 자는 사겸(士謙), 호는 완귀(玩龜)이다. 안증은 아버지가 김종직의 문인이었기에 김종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벼슬에는 뜻이 없고 학문에만 심취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깊이 터득했으나 오히려 실학 사상에 심취해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형조 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설서(說書)가 되었다. 을사사화를 겪은 후 관직에서 물러나 영천으로 내려와 완귀정(玩龜亭)을 짓고 유유자적했다.
저술로는 『완귀실기(玩龜實記)』가 전해지고, 묘소는 영천시 금호읍(琴湖邑) 구암리(龜岩里)에 있다. 영천시 도남동의 호연사(虎淵祠)에 제향되었으나 훼철되고 현재 유허비만 남아 있다.
[건립 경위]
호연사 유허비 및 비각 터에는 원래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안증의 사상과 학덕을 추모하고 향사하기 위해 1850년 호연사를 건립하였다. 그러나 1870년 훼철되었고, 그 후 사손[직계 후손이 없어 친척의 자손이 세계를 잇는 후손]인 안병중(安秉中)이 안동에서 의금부도사를 지내면서 구한 말 당시 의병장으로 있던 김도화(金道和)[1825~1912]에게 찾아가 비문을 짓게 되어 유허비를 세웠다.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며, ‘호연사유허비명(虎淵祠遺墟碑銘)’에 따르면 대략 김도화가 의금부도사를 역임한 1893년에서 사망하기 전인 1912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
호연사 유허비 및 비각은 호연사 터에 방형의 토석 담을 두르고 일각문을 통해 비각으로 드나든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영천 지역에서 가장 큰 것에 해당한다.
비각은 외벌대 자연석 기단 위에 원형의 가공 초석 위에 원형기둥을 세워 비각을 완성했다. 특히 각 모서리 기둥[우주] 하부에는 장초석을 앉혀 풍우에 대비했다. 전체를 홍살벽으로 처리해 내부의 유허비가 잘 보이도록 했다. 정면 어칸이 넓고 협칸이 좁은 구성을 이루고 있다. 기둥 상부는 연화문으로 초각한 쇠서가 있는 초익공 양식으로 처리했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박공면에 풍판을 달아 비바람에 대비했다. 비각 내부에는 중앙에 비좌·비신·비갓으로 구성한 비가 있다.
[현황]
호연사 유허비 및 비각 정면 상부에는 ‘호연사비각(虎淵祠碑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처마의 조로[정면에서 바라본 처마선이 활처럼 휜 모양]로 인해 건물이 경쾌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