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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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好益神道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14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자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45년 - 조호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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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09년 - 조호익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642년 - 조호익 신도비 건립 |
현 소재지 | 조호익 신도비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140 |
소재지 | 조호익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
성격 | 비|비각 |
양식 | 겹처마|맞배지붕 |
관련 인물 | 조호익|이학래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 3.76m |
너비 | 90㎝ |
문물|보호단위 등급 | 비지정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인 조호익(曺好益)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개설]
조호익[1545~1609]의 본관은 창녕,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5년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조호익을 검독(檢督)으로 임명했으나 조호익은 부모 상복을 벗지 못해 나가지 못했다. 이것을 핑계로 최황이 이듬해 평안도 강동현으로 전가사변(全家徙邊)[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평안도나 함경도의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형벌]을 보냈다.
임진왜란 후 유성룡(柳成龍)에 의해 석방되어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된 후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을 모아 왜군을 죽이고 평양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웠다. 그 뒤 안주 부사·정주 목사 등을 지내다가 사직했다. 저서로는 『지산집(芝山集)』 등 많은 저서가 전해지고,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에 있다. 조호익 사후 이조판서 겸 동지의금부사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었다가 후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건립 경위]
조호익 신도비(曺好益 神道碑)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와 많은 저서와 학풍을 남긴 조호익을 기리기 위해 1642년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비의 배면에 신도비 명을 새긴 후 1862년에 이조참판으로 증직되고 시호가 문간공으로 승격되어 1864년 비의 정면과 우측면에 비문을 추가로 새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
조호익 신도비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도잠서원(道岑書院) 내에 있다. 대창면소재지에서 북안면 북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가면 신광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신광2리 지일동마을로 접어들면 영지사로 가는 소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영지사 방면으로 계속 들어가면 도화 저수지가 나오고 이 저수지 옆에 서원이 있다.
[형태]
조호익 신도비는 도잠서원 경내의 망회정(忘懷亭) 옆 비각 안에 있다. 비각은 겹처마 맞배지붕의 단칸 규모로 남향으로 앉아 있다. 벽은 정면을 제외한 삼면의 하부를 심벽으로 처리하고 그 위는 홍살벽으로 마감했다.
정면은 중앙에 외여닫이 문을 달고 나머지는 하부에 판벽 상부에 홍살벽으로 마감했다. 평면은 방형으로 한 칸이 3,210㎜이다. 낮은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앉히고 팔각형의 석주를 세운 다음 원기둥을 세워 비각을 완성했다. 기둥 상부는 연화를 초각한 앙서와 수서 위에 봉두로 꾸민 이익공 양식이다. 기둥 사이에는 화반 3구를 앉히고 그 위에 운공을 표현했다.
비각 내부 중앙에는 귀부·비신·이수로 구성한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귀부는 해학적으로 표현한 거북머리와 거북 등을 표현하고 비신을 꽂았다. 비신은 높이가 2.68m, 폭 90㎝로 크기가 매우 크다. 귀부와 이수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3.76m이다. 이수는 화강석에 쌍용을 조각했는데 이수 상단에 여의주 한 개를 서로 마주보며 물고 있다. 비신은 정면·배면·우측면에 비문과 건비년대(建碑年代)를 새겼다.
[금석문]
조호익 신도비 비각의 정면 상부에는 가로로 ‘증 이조 참판 지산(贈吏曹參判芝山)’이라고 새기고 그 아래 세로 20열로 비문을 새겼다. 배면에는 가로로 ‘조선생 신도비명(曺先生神道碑銘)’이라 새기고 그 아래 19열 1177자의 비문을 새겼다. 비문 맨 끝에 ‘숭정기원지현익돈장맹하일립(崇禎紀元之玄黓敦牂孟夏日立)’이라는 건비년대가 새겨져 있다. 숭정기원은 1628년이고, 현익은 임(壬), 돈장은 오(午)에 해당하는 고갑자로 1628년 이후 첫 임오년인 1642년에 이 비가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비의 우측면에는 1862년에 증이조참판과 문간공의 시호를 더해 1864년에 새겼다는 내용이 있다.
[현황]
조호익 신도비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도잠서원 경내에 단칸 규모의 비각 내부에 있다. 비신의 배면에는 1642년에 새긴 신도비 명이 새겨져 있고 정면과 우측면에는 1864년에 새긴 비문이 있다.
[의의와 평가]
조호익 신도비는 영천 지역의 비석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귀부와 이수를 갖춘 격이 높은 비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