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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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鄕射堂立規懸板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물/유물(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9-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세호 |
제작 시기/일시 | 1614년 - 영천 향사당 입규 현판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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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7년 4월 30일 - 영천 향사당 입규 현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7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영천 향사당 입규 현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장처 | 숭렬당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9-2 |
원소재지 | 숭렬당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9-2 |
출토|발견지 | 숭렬당 -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9-2 |
성격 | 현판 |
재질 | 나무 |
작성자 | 복재(復齋) 정담(鄭湛)[1552~1634] |
크기(높이, 길이, 너비) | 높이1.9㎝|길이32.5㎝|너비126㎝ |
소유자 | 영천시장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숭렬당에 있는 17세기 초 영천군의 향규를 음각으로 작성한 현판.
[개설]
숭렬당에 보존된 ‘영천 향사당 입규 현판’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인 복재(復齋) 정담(鄭湛)[1552~1634]이 1614년(광해군 6)에 종고조인 정종소(鄭從韶)의 영천(榮川)[오늘의 영주] 향규를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정담의 자는 청윤(淸允), 호는 복재(復齋)이며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정몽주의 8촌인 정문예(鄭文裔)의 5세손이며, 정습명의 15대손이다. 증조부 정이상(鄭以常)[생원]과 조부 정굉(鄭硡)[훈도]에 이어 아버지 정인개(鄭仁槩)는 무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감찰을 지냈고 어머니는 영천 이씨로 이희(李熙)의 따님이었다. 영천 도천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영천에서 보냈고 영천에서 죽어서 영천에 묻혔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고향에 도천재라는 서재를 지어 극복당이라 이름하고 제자를 모아 도덕과 의리를 가르쳤다. 1634년(인조 12)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후학들이 도봉서원을 창건하여 신위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렸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다. 선생의 가장 뚜렷한 행적은 1590년[임진년]에 41세로 영천성을 수복하는 전투에 참여한 일일 것이다. 정담의 영천성 수복에 대한 전말을 기록한 「영천복성일기(永川復城日記)」가 그의 『복재실기(復齋實記)』에 전하고 있기도 하다.
향규를 만들 당시 63세가 된 복재 선생은 영천 사림의 원로로서 사회질서를 회복하는데 앞장설 만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10여년 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때였다. 전란이 가져온 사회적 혼란은 기존 질서를 크게 위협하고 있었으며 국가와 양반들의 권위는 실추되고, 백성들은 동요했다. 이에 재지사족(在地士族)은 향규와 향약과 가례 같은 유교적 규범과 제도를 철저히 시행하여 기존의 질서를 다시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영천 향규는 이러한 시대적 산물로서 17세기 영천의 사림이 처했던 상황과 사회적 혼란에 대응하여 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집약된 영천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현판이다.
[형태]
‘영천 향사당 입규 현판’이라고 제목을 붙인 이 현판의 크기는 가로 126㎝, 세로32.5㎝, 두께1.9㎝이며, 제목을 포함하여 1,091자에 달하는 글이 음각되어 있다.
글씨가 선명하여 판독의 어려움이 없으며, 그 내용이 복재 정담 선생의 『복재선생실기』에도 실려 있다. 다만 『복재선생실기』에는 제목이 「영천향사당입규(永川鄕射堂立規)」라고 다르게 표기 하였으며, 맨 끝부분의 ‘만역사십이년사월하한오천후학정담 기(萬曆四十二年四月下澣烏川後學鄭湛 記)’라는 구절의 열일곱 글자를 빠트렸다. 현판의 이름은 ‘향서당(鄕序堂)’ 또는 ‘향사당(鄕射堂)’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향사당’이라고 쓰인 용례가 많다.
[특징]
‘영천 향사당 입규 현판’에는 영천군의 향규를 기록해놓은 것으로, 1614년에 정담(鄭湛)이 지었다.「영천 향사당 입규」는 ‘향규(鄕規)’이다. 향규는 향회의 규약 즉, 회칙이다. 조선 시대 ‘향회’는 한 고을의 유력한 재지사족(在地士族)의 모임이다.
조선 전기 향회의 회원들을 ‘향원(鄕員)’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명단을 ‘향안(鄕案)’이라고 했으며, 향회에 참여 하는 것을 ‘향참(鄕參)’ 이라고 했다. 또 이들의 임원을 향임(鄕任)이라고 하였으며, 이들이 모이는 곳을 ‘향청(鄕廳)’, ‘향소(鄕所)[유향소]’ 또는 ‘향사당’이라 불렀다.
조선 시대 향촌 사회에서의 ‘향안’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여기에 입록될 수 있는 계층은 세족(世族), 현 족이라 불리는 재지사족들이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초기 향촌 사회의 지배권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그들은 ‘유향소’라는 자치 기구를 조직하고 향회를 통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갔으며 ‘향안’에 입록할 수 있는 자격과 절차를 엄격히 통제함으로써 중앙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향규는 전문과 규약 10조 및 후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17세기 초 영천 사림이 전란 후의 사회 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조선 시대 향촌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영천 향규는 이러한 시대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영천 향사당 입규」의 전문(前文)과 규약10조 및 후기(後記)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전문은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데,
첫째, 3월과 9월[春秋季月]에 위양공 이순몽에게 제사를 지내고 나서 강신례(講信禮)를 행한다.
둘째, 이때 ‘여씨향약’과 ‘퇴계약조’를 강(講)한다.
셋째, 친목을 증진하고 기강을 확립하기에 힘쓴다.
넷째, 집강과 풍헌이 협심하여 종사(從事)한다.
제1조는 ‘근동향(謹同鄕)’이라는 제목으로 향회를 개최하는 의식절차를 열거 했는데, 연령에 따른 입장 순서, 인사하는 방식, 연로자를 영접하는 예절, 좌석 배치 등을 규정했다.
제2조는 ‘천집강(薦執綱)’으로 좌수[집강]와 별감[풍헌]의 자격과 선임 방식을 규정했다. 전자가 50세 이상, 후자가 40세 이상이며 후보에 대한 투표를 하여 종다수(從多數)로 결정했다.
제3조는 ‘중체통(重體統)’으로 별감이 좌수를 웃어른으로 모시는 예절을 명시했는데 마치 아버지처럼 깍듯이 모셨다.
제4조는 ‘의신참(議新參)’으로 신입 회원을 심사하는 절차를 규정하였다.
제5조는 ‘돈풍속(敦風俗)’으로 회원이 상(喪)을 당했을 때 인력과 물품을 부조하는 내용인데, 향임을 거친 사람의 경우에는 특별히 우대했다.
제6조는 ‘경관장(敬官長)’으로 신구(新舊) 수령의 영송(迎送)에 참석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제7조는 ‘금외인(禁外人)’으로 외인의 향소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제8조는 ‘중민역(重民役)’으로 재정 지출에 관한 규정이며, 제9조는 ‘집간리(戢奸吏)’로 향리의 죄와 이를 다스리는 절차를 규정했는데 가벼운 죄는 직접 다스리고 무거운 죄는 관에 고한다는 것이다.
제10조는 ‘벌유과(罰有過)’로 몇 가지 반칙과 처벌을 열거 했다. 그리고 ‘후기(後記)’에서는 향규를 만든 취지를 설명하여 집에는 가훈이 있고, 나라에는 국법이 있듯이 향촌에도 규범이 있어서 행동의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천 향사당 입규」는 17세기 초에 영천의 사림이 전란 후의 사회적 혼란에 대응하여 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하고 있다. 물론 양반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그야말로 양반을 위한, 양반에 의한, 양반의 규범이었다 하겠다.
[의의와 평가]
‘영천 향서당 입규 현판’은 17세기 초에 영천 사림이 전란 후의 사회적 혼란에 대응하여 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했다. 영천 사림이 처했던 상황과 그들이 공유했던 세계관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증언이며, 조선 시대의 향촌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이정표로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2007년 4월 30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